손현숙 시인의 '詩의 아고라'(46) 아르나, 박유하
손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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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26 11:53 | 최종 수정 2022.04.02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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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나
박유하
곤히 잠자다가 꿈도 없이 깨어나기도 하고
아무도 없는 거실에서 환청을 듣기도 하면서
아르나는 번뜩 살아있다
바람이 멈추어도 바람 냄새가 나고
당신이 보이지 않아도
온종일 창문을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다는 건
아르나가 퍼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 페이지를 한 시간동안 헤매는 독서는
아르나와 부대끼는 촉감이고
욕조에 몸을 전부 담그면
아르나가 낮달처럼 아른아른 떠 있다
내가 먼저 그 방을 떠나면서
무엇을 두고 온지 모르고
무엇을 두고 왔을 때
아르나, 아르나, 커지기도 하고
아르나, 아르나, 잠잠해지기도 한다
박유하 시집 《탄잘리교》을 읽었다. ‘천년의시작’. 2022.
에셔의 판화그림을 보면 가면서도 오고, 오면서도 가는 화면들로 가득하다. 텅 빈 공간인가 하면 틈을 메우는 이미지들로, 다만 방향을 달리한다. 그런데 그 그림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감히 공空의 세계가 궁금해진다. 천사와 악마가 함께 존재하면서 꿈과 현실이 자연스럽게 혼재되어 있다. 마치 중력을 잃어버린 세상에서의 혼돈처럼, 아니다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또 다른 세상의 질서처럼 흐트러진 모습이 오히려 정연하다.
그렇게 박유하 시인의 첫 시집 속에는 있는가 하면 없고, 없다 싶으면 문득 나타나는 존재들로 가득하다. 꿈속에서 또 꿈을 꾸고. 다시 더 깊은 꿈 안으로 저를 들인다. 그런데 시인이여, 몇 단계의 세상을 거쳐서도 도착하지 못하는 그곳은 어쩌면 박유하가 이미 발 딛고 사는 여기, 오늘일지도 모르는 일. 시집은 몽유와 환청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살아보고 싶은 이생의 꿈들이 감각의 필체로 간절하다. 어쩌랴, 꽃피고 새가 우는 지금이 어제의 과거일지도. 부탁하노니 시인이여, 뒤돌아보지 말기를. 그저 앞을 향해 멀리, 멀리 오늘을 걸어가시길. 여기, 한 번도 떠난 적 없는데 이미 돌아온 박유하의 ‘아르나’가 있다.
◇손현숙 시인은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너를 훔친다》 《손》 《일부의 사생활》 《경계의 도시》(공저) 《언어의 모색》(공저)
▷사진산문집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 『댕댕아, 꽃길만 걷자』
▷연구서 『발화의 힘』, 대학교재 『마음 치유와 시』
▷고려대 일반대학원 문학박사(고려대, 한서대 출강)
▷현 조병화문학관 상주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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