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678) 제7부 돌아가는 꿈 - 제13장 누님 또 누님들⑩

이득수 승인 2024.02.09 07:00 의견 0

“그래도 아 어마이가 요양병원에 댕긴다카이 기본 반찬벌이는 하겠지요.”

“그래 설마 산 입에 거무줄 치겠나? 사람은 잘 나나 못 나나 제 먹을 식복은 다 타고 난다 카이 다 밥은 묵고 살겠지.”

하고 잠시 뜸을 들이다

“그럼 인자 준식이 차롕교?”

“그렇지 말 나온 김에 명촌조카들 까지는 마쳐야지.

셋째 외식이는 외갓집에서 태어났다고 그렇게 불리게 된 아이였다. 그 아이의 이야기를 하려니 자연 제 태어날 무렵 외갓집의 형편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열찬이가 삼남면사무소직원이던 시절 어느 날 문득 의령농협의 대부계를 사표내고 솔가해 온 일찬씨 내외가 어린 백찬이를 데리고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열찬씨가 대학을 입학한다고 부산으로 내려가고 나서 뭔가 집안이 삐꺽거리기 시작했다.

그리 많지 않은 퇴직금으로 앞새메와 바로 붙은 시북논, 여기저기 찬물샘이 있어 한겨울에도 물이 끼어 보리농사는 엄두도 못 내는 땅을 사고 열찬씨가 대학을 갈 때 소를 팔아 입학금을 대어주되 그걸로 살림을 내어준 걸로 하고 다시는 차남으로 권리를 주장하기로 않기로 했는 데다 이어 넷째 덕찬씨에게 중매가 들어와 시집까지 보내는 바람에 수중에 현금이 거의 바닥이 난 것이었다.

처음에는 쉽게 생각하기로 남들처럼 농사나 지으면 되리하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힘이 약해 쟁기질, 써레질을 못 하니 처음 한두 번은 웃 각단에 사는 종찬씨가 도와주어 넘어갔지만 농협직원한테 시집을 가면 다시는 농사를 짓거나 호미를 잡지 않는다고 기대했던 김해댁의 심사도 말이 아니었고 또 다 해야 열댓 섬 나는 그까짓 나락으로 여섯 식구 양식하면 별로 남을 것도 없는 판이라 그간 만사를 시장에서 사다 먹으며 아이 둘을 예쁜 옷에 과자를 입에 달고 살며 먼지 하나 안 묻게 귀하게 키우던 김해댁은 이제 장날 갈치 한 마리나 아이들 과자 한 봉지 사올 형편이 되지 않자 그만 살맛이 떨어진 것이었다.

거기다 체질에 맡지 않는 농사일에 지친 일찬씨는 날마다 청탁을 가리지 않고 술만 마셨는데 예비군 훈련 날 사촌 종찬씨나 미짱네 아들 금춘씨와 마시던 정도의 술이 마침내 날마다 도가술을 받아와 집안에서 마실 정도로 횟수가 늘었고 그렇게 술이 취하면 자연 자신이 처한 황당한 현실, 언양바닥에서 알아준다는 천하의 가일찬이 마침내 농사꾼이 되었지만 거의 모든 일은 남의 손에 맡겨야 하는 반 벙거지에다 여섯 식구의 양식이 될 락 말락 해 비누 한 장 사다 쓸 형편도 아니니 참으로 남 보기에 부끄러운 것이었다.

거기다 외향적 성격의 아내는 잠깐도 가만있지를 못하고 마을의 여러 일에 나서며 남자 여자를 가리지 않고 말을 섞고 못줄에 꽃을 꽂는 부업을 하다 마침내는 일찬씨의 친구가 경영하는 읍내의 화장품대리점에 취직 월부화장품 판매원이 된 것이었고 이래저래 화가 치민 일찬씨는 나날이 술만 늘어갔다.

그러다가 마침내 이직도 학력에 관계없이 시험으로 중등교사를 뽑는 국가고시가 있는 것을 알고 30대 중반의 나이로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그렇게 일찬씨가 세상만사를 잊고 새삼 공부에 열중하는 동안 겉으로는 잠잠해진 집안에 속으로는 엄청난 갈등이 싹트기 시작했다.

겨우 아침밥만 차려주고 한 시간이나 경대 앞에서 화장을 한 며느리가 대리점에 출근하고 나면 아직 국민학교에 다니지 않는 현우, 현숙이 두 아이를 거두는 일에서 무려 800평이나 되는 진장의 밭 두 뙈기의 밭일이 모두 명촌댁의 몫이었고 급히 집에 들러 두 아이와 일찬씨의 반찬도 없는 점심을 챙겨주고 늦게까지 밭일을 하고 돌아오면 아직도 며느리가 돌아오지 않은 경우가 있어 새삼스레 쌀을 씻어 밥을 안치고 남들은 다 연탄아궁이로 바꾸었는데 고래가 막혀 불도 잘 안 들어가는 재래식아궁이에 이제 나무하러 다닐 사람이나 산도 없어 눅눅한 보릿짚을 때어 밥을 하는 일에 덧정이 없는 것이었다. 거기에다 저녁 늦게 며느리가 들어와 작은 채에서 제 아이 둘과 뭐라고 떠들며 사탕을 사다 먹이는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날 때 이제 겨우 중학교에 들어간 막내 백찬이가 그 소리를 못 들은 척 라디오볼륨을 높여 연속극을 듣는 것을 볼 빼마다 부아가 치밀었다.

이제 농사도 모두 남을 준 뒤라 가뜩이나 얼마 되지 않는 논에 겨우 양식이나 될 정도이고 일찬씨는 두 해나 시험에 떨어져 점점 술을 자주 마시고 성격이 날카로워져 제 아내는 물론 명촌댁 앞에서도 고함을 지르기가 일쑤였다. 집안에 수입이라고는 김해댁의 월부화장품을 판 수당이 전부라 있는 양식에 아이 둘의 과자 값이나 가용잡비에는 근근이 미쳐도 석 달마다 돌아오는 백찬이의 월사금이 큰일이었다. 어떤 때는 빚을 내기도 하고 여유가 없는 쌀을 내면서 겨우겨우 메꾸다가 중학교를 졸업하자 형이니 형수나 무슨 약속이나 한 듯이 고등학교진학에 대해 달다 쓰다 말이 없었다.

김해댁의 입장에서는 중학교 시키는 데도 힘이 들어 죽을 판이었는데 더 이상 엄두가 나지 않고 일찬씨는 자기 공부 제 앞가림도 힘든 데다 말이 가장이지 철푼 한 푼 벌지도 못 하는 지라 짐짓 모르는 척 했다. 동갑친구들인 옴말댁 손자 인도, 선동댁 손자 용해, 말랑댁 시준이가 다 언양농고나 부산의 고등학교에 입학을 하면서 제 친구 열찬이가 입학을 안 하는 것을 보고 의아해했지만 원래 말이 잘 없던 백찬이는 달다 쓰다 말도 없이 하루 종일 남천내 갱빈바닥을 돌아다니며 죄없는 중태기나 잡아와도 나이든 명촌댁이 끓일 염도 않아 제 스스로 배를 따고 장을 퍼와 냄비에 안치고 풋고추를 따다 보리밥을 지어 상을 차리면 어린조카 둘과 형님이 둘러 앉아 점심을 먹었고 모처럼의 비린 음식에 일찬씨가 막걸리생각이 간절해 입맛을 다셨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해가 다 지나가도 내년에는 어떻게 학교에 보내겠다는 말도 없고 살림살이는 점점 쪼들리고 일찬씨는 또 한 번 시험에 떨어지고 점점 성질이 사나워져 술이 한잔 들어가면 조선에 말릴 사람이 없어 제일 성질이 괄괄한 진외가 당숙모인 대동댁도

“일찬아, 니도 언간히 좀 해라. 내가 성질이 사나운 불 칼이면 니는 내보다 몇 몫 더한 천둥번개다.”

할 정도로 마을에서 대적할 사람도 없었다. 단지 그동안 화장품 외판을 시작한 김해댁은 그 청산유수의 입담과 체면을 가리거나 부끄럼도 타는 일도 없고 남의 남자라고 해서 특별히 내외를 하는 일도 없는 거침없는 성격으로 좁은 언양바닥의 몇 안 되는 사무실인 면사무소와 농협, 우체국과 전매서, 농산물검사소를 출입하며 찰떡같은 입담으로 실적을 올리고 남자만 근무하는 지서에서 남성용 로션을 팔기도 했다. 몇 안 되는 미장원과 시장 통의 좀 장사께나 하는 가게와 술집에도 드나들며 어느 새 미장원아가씨들에게는 언니동생이 되고 술집아가씨들에게는 왕언니가 되었고 심지어 일찬씨가 절대로 가지 말라고 하는 일찬씨 국민학교 동창생 정성특씨의 약방에도 자주 출입해 소심한 성특씨가 친구의 얼굴을 보아 부인의 화장품도 사주고 들릴 때마다 고생 많다며 박카스도 한 병씩 주기도 했다.

부산의 열찬씨는 한해는 이리저리 융통해 대학등록금을 대었지만 공무원의 월급이 하도 박봉이라 6개월 치를 다 모아도 상하반기 일회의 등록금에 못 미치는 판에 그 젊은 나이에 밥도 먹고 술도 먹어야 하니 방도 못 얻어 숙직실에서 버티면서도 이듬해엔 등록금을 못 내 자진 휴학을 하고 술독에 빠져 지낸다더니 한해를 더 지나 노상 밥을 굶고 술을 퍼마신 푸석푸석한 얼굴로 버든으로 돌아와

“다음 주에 입대합니다. 잘 갔다오께요.”

하고 떠나는데 돈 한 푼 보태줄 형편이 안 되는 명촌댁이나 김해댁이 멀뚱멀뚱 쳐다만 볼 뿐이었다. 일찬씨가 또 시험에 떨어지고 동갑아이들이 고등학교 2학년에 올라가는 이듬해 3월에도 역시 고등학교입학에는 달다 쓰다 말이 없자 명촌댁이 모진 결심을 하고 창고에서 옛날 언양장에서 고춧가루를 팔던 반티를 찾아 나왔다. 먼지가 보얗게 안고 모서리에 거미줄까지 하얀 반티를 깨끗이 닦더니 집안 구석구석에 있는 배추씨, 무씨를 찾아 담고 장에 나가 옛날 앉던 자리에 가서 새로 자리 잡은 채소장사에게

“보소. 여가 옛날부터 내 자리요.”

자리를 내어놓으라고 하자

“아니, 이 할마씨가 난데없이 자리를 내 놓으라고 지랄이네. 보소, 언양장터에 내 자리 지 자리가 어디 있소? 먼저 앉은 사람이 장사하고 장세 내면 되는 거지.”

하고 대들었지만 셈이나 물체가 다 늦어도 뚝심하나는 덮을 사람이 없는 명촌댁이 물러날 기미도 없어 우르르 몰려든 사람들 중에

“아이구, 버든에 고춧가루 팔던 명촌댁이 또 나왔네. 아들 둘이 천재라카더마는 뭐가 답답어서 또 난전에 나왔능고?”

하는 사이에

“아이구, 형님이 나왔능교?”

덩치로나 고함소리로나 언양 장 시게전 쌀장사 중에서 덮을 사람이 없는 4촌동서 조일댁이 나서자

“아이고, 명촌댁이 아지매!”

젊은 유구장댁 광호엄마와 마침 채소를 팔러왔던 옆집의 상천댁까지 아는 채로 하고 가까운데서 소이까리를 팔던 이조이상과 수동댁 수봉씨, 대나무소쿠리를 팔던 하잠김손도 멈바시 바라보며 아는 채를 하고 마침내 염소구전꾼으로 일하는 큰집의 정찬씨도

“아이구, 잔엄마!”

겹겹이 둘러서자 목소리 큰 조일댁이

“이 년의 안들이 어데서 굴러먹던 개뼉다군지 그 동안 남의 자리에서 7,8년 장사 잘 해묵었으면 됐지. 어데서 감히 니 자리 내 자리를 찾노? 여 둘러선 장사꾼들한테 다 물어보소. 이 자리가 우리 형님이 장사하던 자리가 맞는지 아닌지?”

하면서 어리둥절한 채소장사의 물건을 이리저리 밀치고는

“자, 형님. 여 반티 놓고 앉으소.”

해서 장사를 시작해

“야! 이기 누고 버든에 꼬치가루장사 명촌댁이 아이가?”

전부터 안면이 있는 사람, 특히 친정 명촌과 외가 향산쪽 사람들이 따지지도 않고 물건을 사는 바람에 금새 무씨, 배추씨를 다 팔고 그 돈으로 다시 무, 배추씨와 고춧가루를 사와 해 안에 다 파니 제법 수입이 짭짤했다. 그렇게 몇 장이 지나 제법 푼돈이 생기자 막내 백찬이에게

“야야, 니 묵고 싶은 것도 좀 사묵고 인도나 시준이 하고 놀러도 좀 댕기고.”

용돈까지 쥐어주더니 마침내 며느리 김해댁을 불러

“니 새끼 니 키우고 내 새끼 내 키우자. 내가 농사짓던 땅이니까 양식만 대어두가. 내 꼬치가루만 팔아도 내 자식 백찬이 하고 둘이 굶어죽지는 않을 끼다.”

하고 짐을 사는 지라

“어무이, 와 그라능교? 뭐가 섭섭한지 몰라도 지가 잘 못 했심더. 이 짐 푸이소.”

아무리 사정하며 빌어도 열두 살이나 많은 호랑이 같은 남편 명촌이손도 못 꺾던 황소고집이 어디 가랴

“씰 데 없는 소리 하지 말고 마 놔라! 설마 저 아 하고 내하고 두 식구 산입에 거미줄을 치겠나?”

부득부득 일어나는 걸

“보소, 우현이 아부지! 어무이가 대름 데리고 나간답니더. 우째 좀 말리보소.”

사정을 해서 밖으로 나온 일찬씨가

“어무이, 마 참으소. 내 자꾸 시험에 떨어져서 안 그래도 송신해 죽겠는데 마 쪼깨만 참으소.”

통사정을 해도

“너거 연놈이 언제부터 어무이고 동생이고? 그래 걱정하는 인간들이 부모도 오래 못 보고 불쌍타고 너거 아부지가 눈도 못 감고 죽은 망내이 백찬이를 2년이나 학교에 안 보내나?”

하고 부득부득 말려도 되지 않자

“어무이, 나가기는 숩어도 다시 오기는 힘듭니더.”

하고 미리 방을 얻어둔 정거장마을을 향하며

“가자! 니는 안 갈 끼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멍하니 서서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던 백찬이가

“형수, 나도 감데이. 엄마 혼자 가면 눈이 어둡어서 불낼 줄도 모리고...”

들릴 락 말락 할 목소리와 함께 삽짝 문을 벗어나자

“아이구, 골치야. 막걸리나 한 되 받아 온나.”

일찬씨가 단숨에 한 주전자를 비우고 뭐라고 한참이나 소리치다 잠이 들었다.

※ 이 글은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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