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명촌리 사계(四季) 184 가을의 노래 - 울밑에 선 봉선화
이득수
승인
2021.10.12 17:14 | 최종 수정 2021.10.15 10:04
의견
0
봉숭아는 너무 빨리 크게 자라 단번에 짚동만한 부피에 수백송이의 꽃을 피워내어 늘 화단이 아쉬운 아내가 발견 즉시뽑아 버리는 애물단지입니다.
그렇지만 올해 유난히 잦은 장마와 사나운 태풍을 틈타 아무도 눈을 돌리지 않는 사이에 제가 휴식을 취하는 라꾸라꾸침대 뒤의 으슥한 자리에서 금방 목을 뽑고 급하게 몇 송이의 꽃을 피워내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수세로 보아 초여름에 꽃이 피어 떨어진 열매에서 자라난 두벌 꽃인 것 같습니다.
특별히 드러나게 아름답기보다 주변의 잡초와 잘 어울려 편안한 느낌이라 저는 오랜 친구라도 만난 듯 꼼꼼히 들여다보며 같은 듯 다른 다섯 종류의 빛깔을 즐깁니다.
세월이 너무 좋아 외래종 화초들이 많이 들어와 어느 새 <울밑에 선 봉선화>처럼 찬밥신세가 되어버렸지만 저는 여전히 토종 봉숭아에 마음이 끌려 내년에도 여기저기 슬쩍슬쩍 아내 몰래 새까만 씨를 흩어볼 작정입니다.
<시인, 소설가 / 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