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명촌리 사계(四季) 179 가을의 노래 - 이 멋진 판화는
이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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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06 18:39 | 최종 수정 2021.10.10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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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촌리 3반 포근한 대밭 아래 옹기종기 등을 댄 마을, 햇빛마저 비스듬히 비친다고 사광(斜光)리란 이름이 붙은 조그만 마을 앞의 논둑 옆입니다. 전에 콩밭에 새를 쫒는 페트병 팔랑개비를 만든 변 씨 성을 가진 장영실의 아내가 이번에 멋진 판화(版畫) 한 점을 만들어내었습니다.
요즘 농부들은 농사지은 벼의 대부분을 콤바인으로 벼 베기에서 타작까지 논스톱으로 처리해 거대한 자루에 담아 지게차로 구판장으로 가서 무게를 달아 당일로 돈을 받아오는데 그걸 ‘물수매’라고 합니다.
그런데 자기네가 직접 먹을 양식은 품종도 수확량보다는 밥맛이 좋은 벼로, 또 찰벼까지 끼워서 심습니다. 그리고 저렇게 잘 말려서 방아를 찧어 객지에 나간 아들딸에게 보내고 일부는 광에 쌓아놓고 그 때 그 때 조금씩 도정기로 찧어 밥을 짓습니다.
사진은 칠십이 넘어 허리가 제법 많이 굽은 변 씨네 할머니가 몇 자루의 벼를 붓고 밀개로 편편하게 밀고 바람이 잘 통하게 맨발로 골을 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가로세로로 질서정연한 무늬가 아니고 비뚜름한 선이 둥글게 휘어지기도 하고 가운데 스카이웨이처럼 입체적 곡선을 이룬 것이 얼핏 보면 남해의 ‘다락논’을 닮은 것 같지만 어떻게 보면 참으로 안목이 높은 작가가 익숙한 솜씨로 목판에 판화 한 점을 새긴 것 같기도 합니다. 예술이란 모름지기 저렇게 편안하고 자유로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기왕이면 바닥이 짚으로 짠 낡은 덕시기(멍석)였으면 좋으리라 싶었지만 고공품이라고 불리는 짚으로 된 가공품, 멍석, 멱둥구리, 씨오쟁이, 가마니 등이 농촌에서도 이미 절멸한 지가 오래되어 어쩔 수가 없습니다.
저렇게 훌륭한 작품을 남긴 여류작가는 지금 어디 다른 밭고랑에 마늘을 심거나 김장 무를 속아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해가 질 무렵 돌아와 자기가 만든 작품이 그렇게 명작인줄도 모르고 벼를 다시 가운데로 모아 도로 덮을 것입니다.
그러고는 영감님의 저녁 식사를 위해 솎아온 무를 삶아 멸치와 된장을 넣고 시래기 된장을 지질 것입니다. 그리고 내일 아침 해가 뜰 때쯤 또 다른 모양의 판화를 그릴 것입니다. 저는 50년 넘게 문학에 매달렸지만 아직 저처럼 편안하고 자유로운 가운데 삶의 향기가 묻어나는 작품 한 점을 못 한 것 같습니다.
<시인, 소설가 / 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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