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명촌리 사계(四季) 175 가을의 노래 - 천고마비(天高馬肥)
이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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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05 20:44 | 최종 수정 2021.10.05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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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마비(天高馬肥)는 코스모스, 낙엽, 추석 등과 함께 우리에게 가을을 느끼게 하는 가장 상징적인 단어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은 높고 말이 쌀이 찐다는 이 말은 우리가 어릴 적 모깃불을 놓고 멍석에 누웠을 때 밤하늘의 별이 손에 닿을 듯 내려오면 문득 소매 끝에 찬 기운이 스치다 마침내 도구나락을 베어 찐쌀을 먹던 기억, 드문드문 해콩을 넣은 햅쌀밥에 은빛 찬란한 갈치찌개로 저녁밥을 먹어, 그간 먹지 못해 마른버짐이 피거나 너무 먹어 짜구가 난 아이들의 볼에 발그랗게 살이 올라온다는 그런 오롯이 행복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옛날 한자문화권의 중심인 중국의 북방, 만리장성이 이어지는 천산산맥, 알타이산맥, 인산산맥, 대흥안령산맥을 너머 지금의 몽고와 카자흐스탄지역 넓고 거친 황야와 사막에는 사나운 유목민족 흉노가 웅크리고 살며 해마다 중원을 침략해 골칫거리였는데 가장 흉노의 세력이 왕성하던 묵특이란 선우(單于)가 지배하던 시절에는 한나라에서 왕소군이란 궁녀를 선우(왕)에게 바칠 정도였지요.
고사성어에 천고마비, 말이 살찐다는 것은 바로 흉노의 말이 통통하게 살이 쪄 중원의 벼와 밀을 추수하는 늦가을이나 초겨울에 조랑말 수준의 중국말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크고 날랜 호마(胡馬), 심지어 피처럼 땀을 흘리며 하루에 몇 천리를 달린다는 한혈(汗血)마를 타고 중원을 습격하니 모든 것을 약탈(掠奪)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천고마비는 맑고 높은 하늘을 찬탄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흉노의 내습을 우려하는 탄식으로 향토예비군의 창설자인 박정희 대통령의 <유비무환>에 가까운 무겁고 엄숙한 단어입니다.
그렇지만 재미있는 것은 그 사나운 흉노도 한창 가을걷이를 하는 가을엔 습격을 삼간다는 점입니다. 어쩌면 폭풍전야처럼 불안한 가을 한 철 중원의 농사꾼들이 어떻게든 곡식을 거두고 또 어떻게든 감추어야 하는 것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하늘이 푸른 호시절 가을을 그렇게 흉노의 침략이나 걱정하고 지내기는 참으로 아쉽지요.
그렇지만 사람은 그 무엇보다도 우선은 살아남아야 하고 먹어야 하니 일단은 곡식을 거두어야 하는데 누구나 고생고생하다 죽어가는 한 평생, 그저 그 때 그 때를 즐기며 베짱이처럼 살 것이냐, 개미처럼 오로지 일하고 모으면서 하고 살 것이냐가 화두(話頭)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개미처럼 살 것인지, 베짱이처럼 즐길 것인지 어떤 삶을 원하십니까? 세상에 공짜 점심이 없다는 말처럼 천고마비, 저 높푸른 하늘도 절대로 공짜는 아닌 것입니다.(내일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시인, 소설가 / 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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