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명촌리 사계(四季) 173 가을의 노래 - 전설처럼 무성한 풀
이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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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03 19:54 | 최종 수정 2021.10.03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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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옛날 양계장이 문을 닫자말자 슬금슬금 침입한 오동나무와 누룩나무와 덩굴들이 볕도 안 드는 시멘트 바닥에서 악착같이 살아남아 창틀이 날아가 골조만 남은 지붕을 뚫고 승리의 포효를 내뿜는 장면입니다.
날고 뛰는 사람보다는 조그만 곤충이나 미생물이 더 강하고 그런 동물보다 더 강한 것이 식물이며 그것도 훤칠한 송죽(松竹), 소나무나 대나무가 아니라 칡이나 새삼 같은 덩굴, 그보다 못한 잡초나 이끼(地衣類)가 더 강하다고 하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히틀러든 모택동이든 그 어떤 독재자든 나무나 잡초, 이끼나 모기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건 인간이 이루려 하는 모든 꿈이나 수단이 인공(人工)인데 비해 시간을 등에 업은 하찮은 동식물이야말로 자연(自然) 그 자체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초등학교시절 「아카시아 꽃잎이 필 때」라는 영화를 단체관람한 일이 있습니다. 용감한 병사가 치열한 전투 끝에 전사한 언덕에 훈장을 든 그의 연인이 나타나
“당신이 싸워 지킨 이 땅에 아카시아 꽃이 피고 잡초가 우거졌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의 이 훈장이나 영웅칭호도 언젠가 저 어두운 숲속에 묻혀 우울한 전설이 되고 말 것입니다"라고 말한 대사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세월이라는 불가항력의 배를 타고 저 우울한 숲, 퇴색한 나뭇가지 끝으로, 또 어둑한 잡초 속으로 흘러 마침내 먼 훗날의 침침한 전설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아직 언덕에 서서 나무를 보고 풀밭을 보고 꽃을 보고 있는 것이 어디입니까? 「살아있는 전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숨 쉬고 있는 당신과 나, 우리가 바로 전설인 것이지요.
<시인, 소설가 / 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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