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명촌리 사계(四季) 170 가을의 노래 - 무슨 꽃일까? ... 팥
이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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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30 14:01 | 최종 수정 2021.10.01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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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10월인데 이제 한창 줄기를 뻗어 연초록 잎을 피움과 동시에 황급히 노란 꽃을 피워내는 저 식물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정답은 '팥'입니다.
팥죽과 떡고물, 양갱의 재료로 우리네 미각을 넘어 삶의 단맛이 된 팥은 콩팥이라는 단어처럼 사촌격인 콩의 위세에 눌려 제대로 된 평가를 못 받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 인류의 주식을 인구부양력에 따라 서열을 매기면 쌀, 밀, 옥수수, 콩, 고구마, 감자, 보리... 등의 순(順)이 되는 데 떡과 빵, 동지팥죽의 재료로 우리 미각을 주도하는 팥은 20위 권 이하로 너무나 홀대를 받고 있는 형편입니다. '앙코(팥속)없는 찐빵'이라는 말처럼 고유하면서도 절대적 용도를 가졌으면서도 말입니다.
그러나 수천 년 모진 가난을 이기고 살아온 농군의 입장에서 보면 팥은 늘 가뭄과 홍수, 병충해에 시달리며 살아온 자신들처럼 가장 질기고도 모진 동병상련의 곡식이자 친구인 것입니다.
농사용어로 대파(代播)작물이란 단어가 있는데 이는 가뭄이나 홍수, 병충해 등으로 파종기인 봄에 제대로 된 씨를 넣지 못하고 여름이나 초가을에 울며 겨자 먹기로 성장과 결실주기가 짧은 곡식을 심어 흉년을 이겨내는 작물로 대표적인 것이 메밀입니다.
그러니까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은 풍요한 농촌의 목가(牧歌)적 낭만을 상징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굶어죽지 않으려고 버티는 가난한 화전민과 보부상들의 이야기가 됩니다.
너무나 비가 안 오고 땅이 여물어 그 메밀마저 심지 못 하한 늦여름에 비로소 비가 내릴 때 농민들이 최후로 심는 작물이 바로 팥입니다. 붉은 빛의 열매처럼 세상 모든 장애를 극복하는 열정이랄까 왕성한 생명력이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옛날 시골할머니들은 논밭에 나갈 때 늘 팥이 한 줌 담긴 주머니를 차고 다니며 한 뼘이라도 곡식이 안 심긴 땅이 나타나면 팥 씨를 넣어 '입추(立秋)가 지났는데도 팥을 심는다'는 속담이 다 있는 것입니다. 우리네 할머니들이 그렇게 끈질기게 먹여 살린 새끼들이 바로 현대인인 것입니다.
떡과 죽과 빵과 아이스크림과 양갱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의 미식(美食)에 늘 함께하는 친구라 오죽하면 '떡고물이라도 좀 떨어질까 싶어서'라는 속담이 다 나왔을까요?
너무 늦게 심어 초가을에 아직도 연두 빛 잎을 팔랑거리는 저 연약한 생명체, 팥은 그냥 팥이 아니라 바로 한국인의 미각(味覺)이며 생명 그 자체인 것입니다.
<시인, 소설가 / 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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