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명촌리 사계(四季) 171 가을의 노래 - 팥 이야기
이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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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30 14:15 | 최종 수정 2021.10.02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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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올린 팥꽃 이야기를 보고 세상에 소중하지 않은 것은 없다는 댓글을 올라 팥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이어가겠습니다.
어제 말한 팥죽이나 떡고물, 양갱 같은 팥의 용도는 주로 식용(食用)에 관한 이야기지만 오늘은 미백(美白) 즉 화장품 및 주술적, 교훈적 용도에 관해서 이야기해보기로 하겠습니다.
붉은 색의 팥은 그 속살이 모든 곡식 중에서 가장 희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주로 자연화장품을 사용하던 시절의 처녀들이나 멋쟁이 여인들이 하얀 팥 속, 즉 팥가루를 얼굴에 발랐답니다. 그러니까 팥은 민간 화장품의 원조인 셈입니다.
또 동지팥죽은 바야흐로 침침한 어둠과 우울한 바람과 매서운 추위가 지배하는 엄동설한의 가장 내밀한 부분에 진입하는 동짓날 왠지 어둡고 불안한 죽음, 또는 불운에 대한 공포를 씻고 귀신을 쫓기 위해 귀신이 가장 싫어하는 붉은 색의 팥죽을 대문간에 뿌리는 것에서 시작되었답니다.
대추나무나 엄나무를 문전에 심는 것도 물론 그 열매나 잎을 먹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그 사나운 가시로 집안에 침입하는 불행을 막아내는 액(厄)땜이 가장 큰 이유였고요.
마지막으로 우리나라 토속적 민담(民譚) <콩쥐팥쥐>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콩쥐팥쥐>에는 단 한 명의 조연 계모와 두 명의 주인공 콩쥐와 팥쥐로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왜 하필이면 착하고 부지런하고 예뻐서 마지막에 웃는 역은 콩쥐가 그러니까 콩이 맡고 우리의 주인공 팥은 왜 계모의 자식이라는 천한 신분에 못 생기고 심술궂은 캐릭터를 맡았을까요?
어차피 콩과 팥이라는 같은 듯 다른 그러니까 이복자매를 주인공으로 쓰다 보니 언니인 콩이 선하고 아우인 팥이 악역을 맡았다고 하겠지만 여기에도 우리 한국인이 지향하는 3개의 가치관이 있습니다.
그 첫째는 본처자식인 콩쥐가 우대받아야 한다는 생각, 그러니까 적서(嫡庶) 차별에 있어 어순(語順)이 뒤인 팥쥐가 선한역의 언니가 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또 하나는 장유유서(長幼有序)와 효제(孝弟)의 개념상 나이어린 팥쥐는 당연히 천하고 악한 역을 맡아야하는 것이고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착한 콩쥐는 두꺼비가 깨진 독을 막고 소나 개미가 밭일을 도와주는 바람에 계모의 괄시에서 벗어나 원님에게 시집을 가는 이야기가 상징하는 권선징악의 의미지요.
아무튼 또록또록 잘 생기고 붉은 겉과 새하얀 속으로 미식과 미백의 재료인 팥이 이렇게 끝끝내 찬밥신세가 되는 게 많이 아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야기가 너무 길었나요. ㅎㅎㅎ.
<시인, 소설가 / 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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