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숙 시인의 '詩의 아고라'(122) 세월, 문효치

손현숙 승인 2024.03.23 07:00 의견 0

세월

문효치

입춘 지나 매화 왔다 가고
서낭당에도 귀신 왔다 가고
이어서 명자꽃 다녀가고
썩다 만 장승 한 쌍 지나가고
초파일경 불두화 오면
말뚝이 탈도 따라오고
뒤이어 감꽃
복날 무렵 배롱꽃 스르르
내 그리움도 마당 가득
날 뜨거워
그림자 여기저기 서성거리고

문효치 시인

시집 《헤이, 막걸리》을 읽었다. ‘’ 미네르바. 2023.

엊그제 청악매 꽃망울 터뜨리더니, 오늘은 그 꽃들 만개했다는 소식이다. 얼음 땅을 열고 건너온 꽃들에게 경배하면서도 또 가는 길은 얼마나 고단할까, 지레 겁이 나기도 한다. 위의 시에서 시인은 계절마다 피고 지는 꽃들을 데려오고 또 보내면서 저승의 존재들까지도 소환한다. 오래 시를 써오면서 삶과 죽음을 필사했던 시인은 “스르르” 삶이 오고 가는 모습을 담담하게 그린다. 그런데 이 시는 화자의 시간이 어느 한 시절에 매어있지 않다. 매화였다가 명자였다가 불두화였다가 다시 그림자로 회기 하는, 아마도 시인은 시간을 넘어서는 한 지점에서 이생의 그리움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손현숙 시인

◇손현숙 시인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너를 훔친다》 《손》 《일부의 사생활》《경계의 도시》(공저) 《언어의 모색》(공저)
▷사진산문집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 『댕댕아, 꽃길만 걷자』
▷연구서『발화의 힘』, 대학교재『마음 치유와 시』▷고려대 일반대학원 문학박사(고려대, 한서대 출강)
▷현 조병화문학관 상주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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