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시학 4호-신인상 추천사】 고단하고 쓸쓸한 삶의 서정적 승화 - 최서림

장소시학 승인 2024.06.18 16:33 의견 0

<추천사>

고단하고 쓸쓸한 삶의
서정적 승화 - 신명자론

최 서 림

신명자의 시들은 이야기를 함유한 서정시다. 다시 말해 서사적 요소를 함축한 서정시다. 그의 시는 서사적 사건을 모방하고 재현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고 관찰하는 시적 화자의 감정 표현에 무게를 두고 있다. 이를 두고 이야기시 또는 서술시라 한다.

그리고 신명자의 시는 일상적 삶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일상적 삶에 뿌리를 두었다는 것은 시적 토대가 튼튼하다는 것을 뜻한다. 구체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설득력이 높다. 설득력이 높다는 것은 그럴듯하다는 것이다. 즉 시적 전개에 개연성이 높아 무리수가 적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시는 수사나 기교에 의지하지 않고 시인의 내공에 기대고 있다. 시인의 삶과 히스토리가 시를 밀고 나가는 힘이 된다. 시인의 내공에 기댄 이러한 시들은 젊은 시인들의 화려한 세련미와는 다른 투박하고 자연스러운 미를 보여 준다. 이런 시들이 쉬우면서도 깊이 있고 감동적이다. 자연스럽고 소박한 생활서정시, 이야기시는 오늘날 시인들이 잃어버린 독자들을 되찾아오는 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먼저 「낮달」이란 시에서, 낮에도 지지 못하고 하늘에 떠 있는 ‘낮달’은 은퇴한 남편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은퇴하고 쉬지도 못하고 농막 생활을 하면서 인생 후반기를 바쁘게 살아가는 남편을 바라보는 시적 화자의 시선이 쓸쓸하다. 먹을 식구도 없는데 남편이 기른 채소들이 거실과 냉장고에서 시들어간다는 게 화자를 쓸쓸하게 한다. 그리고 은퇴 후 빨리 늙지 않기 위해, 일부러 농막 생활을 자청해서 하는 남편은 농막에서 희미한 낮달처럼 먹을 사람 없는 채소처럼 시들어가고 있다. 낮달과 늙은 남편을 통해서 삶의 고단함과 쓸쓸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을 감싸는 전체적인 분위기가 절망적이거나 우울하지는 않다. 약간 쓸쓸할 뿐이다. 그리고 이 쓸쓸함이 연민에 닿아있음을 알 수 있다. 은퇴 후에도 쉬지 못하고 부지런히 일하는 남편이나 낮인데도 자기 처소로 돌아가서 쉬지도 못하는 낮달을 바라보는 시적 화자의 연민을 볼 수 있다. 이 연민도 사랑의 한 방식인데, 젊은 남녀 간의 애정보다 더 깊고 면면하다. 이렇듯 이 작품은 사랑의 시학으로 되어 있다. 자칫 절망이나 우울로 빠질 수도 있는 삶을 사랑의 힘으로 긍정의 힘으로 감싸 안으면서 시적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이것이 바로 서정이 지닌 힘이다. 삶 자체를 긍정하는 측은지심의 힘!

시적 화자의 따뜻한 시선은 상이군인을 대할 때도 빛이 난다. 「무명용사」라는 작품에서 화자는 친정어머니로부터 배운 사랑의 정신으로 상이군인들을 대한다, 6 ․ 25 전쟁 때 나라를 지키다 부상을 입은 상이군인에겐 따뜻한 밥 한 끼가 사랑이고 온정이다. 그런데 시적 화자가 지닌 사랑의 시선은 더 높은 곳에 머문다. 비록 부상을 입은 무명용사지만 두 눈은 별 계급장이라 칭송해준다. 문학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은 밥 한 끼 준다는 데 머물지 않고 역사와 현실에서 패배하고 소외된 자의 명예를 회복시켜주는 데 있다. 이것이 서정시가 지닌 사랑의 위력이다.

이야기시에는 인물을 소재로 한 작품이 많을 수밖에 없다. 신명자의 이야기시도 마찬가지다. 이야기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평범하지만 고단한 삶을 살아낸 사람들이다. 그것이 서사시와 다른 점이다. 통상 서사시는 영웅적 인물의 일대기를 다룬다. 그에 비해 이야기시는 갑남을녀의 희로애락을 다루는 서민적 장르라는 의미에서 평범한 독자들에게 전달력이 높다. 「진을수 여사」라는 작품에서 그런 높은 공감력이 보인다.

공감력이 높은 시가 큰 감동을 준다. 진을수 여사는 마산 어느 시장바닥에서 미역을 파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미역을 팔아 일곱 자식 학비를 대고 남편 술값까지 해결해 준다. 그리고 배를 타고 부산으로 가서 남포동에서 미역을 풀어놓고는, 쌀, 고구마를 머리에 이고 들고 해서 영도다리 걸어서 건너 신선동에 있는 중학생 아들 자취방까지 갔다 오는 등 고단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시가 여기서 끝나버리면 독자들도 마음이 힘들고 무거워진다. 이를 의식해서인지 시적 화자는 “동태 다라이 이고 배에서 내리시던 그녀/자글자글 미역귀 모습”이라 마무리 지음으로써 진을수 여사의 신산한 삶에서 생에 대한 애착을 보여 준다. 수준 높은 유머와 해학까지 겸비한 이 구절이야말로 신명자 이야기시의 백미가 아니겠는가.

최서림 시인

최서림

시인·화가·문학평론가. 경북 청도 출생. 본명 최승호. 서울대 문학박사.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역임. 1993년 『현대시』로 문학사회 나섬. 시집으로 『이서국으로 들어가다』, 『유토피아 없이 사는 법』, 『구멍󰡕 ․ 『버들치』, 『시인의 재산』 들을 냈다. 애지문학상, 동천문학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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