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숙 시인의 '詩의 아고라'(144) 슬픈 거짓말을 만난 적이 있다, 진란

손현숙 승인 2024.10.19 09:00 의견 0

슬픈 거짓말을 만난 적이 있다

진란

하루 종일 하늘이 무거웠다
먹구름이 잔뜩 물을 들이켰는지
한낮도 한밤중 같았다
바람이 세차게 불기 시작하고
창문을 마구 흔들어 덜그럭거렸다
문이란 문을 죄다 닫아걸었더니
틈을 찾는 바람의 울음이 휘잉 휘이잉
그 안에 내가 있는 것을 안다고
불온한 목소리로 흔들어 댔다
들판에 배곯는 승냥이 울음 같은
사랑이 두려웠다
이름을 불러가며 빙빙 도는데
나는 여기 없는 척 숨을 죽이고
악착같은 네 사랑을 믿지 않았다

진란 시인

진란의 시집 《슬픈 거짓말을 만난 적이 있다》를 읽었다. ‘2023 시인동네 시인선 178’

사랑의 유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것에는 동료적인 사랑도 있고 열정적인 사랑도 있다. 논리와 소유로 사랑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이타와 유희로 혼란을 겪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사랑의 끌림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더 크게 지는 이상한 게임. 위의 시에서 화자에게 다가오는 너,라는 존재는 사람의 통솔로 통제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바람이었다가 하늘이었다가 먹구름이었다가 목소리였다가 급기야는 울음이 되기도 한다. 이 속수무책 앞에서 화자, 곧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없다. 천지불인하는 자연 앞에서 화자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자존심이란, 그저 도망치면서도 네 사랑을 확인하는 거. 그거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또 무엇이 있었을까.

손현숙 시인

◇손현숙 시인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멀어도 걷는 사람》 《너를 훔친다》 《손》 《일부의 사생활》 《경계의 도시》(공저) 《언어의 모색》(공저)
▷사진산문집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 『댕댕아, 꽃길만 걷자』
▷연구서 『발화의 힘』, 대학교재 『마음 치유와 시』
▷고려대 일반대학원 문학박사(고려대, 한서대 출강)
▷현 조병화문학관 상주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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