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숙 시인의 '詩의 아고라'(142) 누상동 분꽃, 임희숙

손현숙 승인 2024.10.05 08:00 의견 0

누상동 분꽃

임희숙

비 개인 인왕산에서
덜 마른 물감 냄새가 났다
구름은 녹아서 산 아래로 흐르고
누상동 누구네 분꽃 화분
꽃들이 뱉어놓은 씨앗이 알맞게 익어
까만 씨 한 줌을 은근히 흝었다
이를테면 도적질, 사유물손괴일 터였지만

봄날에 다시 누상동으로 갔을 때
주머니 속 바짝 마른 씨앗이 손에 닿았다
곳곳 분주한 누상동
내 꽃 말고도 그렇게 찾아온 씨앗으로
이미 아득한 곳에 있었다

다시 혼자가 되었다

임희숙 시인

임희숙의 시집 《수박씨의 시간》을 읽었다. ‘2022. 황금알’

소설은 고통의 서사 속에서 꽃을 피우고, 시는 주로 슬픔의 정서를 드러낸다. 그래서 그런지 시인들은 우울이나 슬픔을 누구보다 더 빨리 체감 한다. 위의 시에서 시인은 두 번의 봄날을 정경화 한다. 첫 해 봄, 시인은 씨앗을 가득 품은 분꽃 화분을 인왕산 아래 누상동의 누구네 집 꽃밭에서 발견한다. 그리고 다음 해 시인의 꽃밭에도 만발할 꽃들을 생각하면서 “까만 씨 한 줌을 은근히 흝”어서 집으로 돌아온다. 이미 생식이 끝난 꽃의 끝물이 아니라, 다시 만개로 돌아올 꽃들을 희망하면서 “이를테면 도적질, 사유물손괴”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그렇게 어찌어찌 시간이 지나 다시 봄, 같은 사람이 같은 길을 지나게 된다. 그리고 다시 맞닥뜨린 누상동의 분꽃은 남의 일처럼 만발해 있는데, 시인의 꽃씨는 만개는커녕 오히려 바싹 말라서 시인의 손끝에서 서늘하다. 시인이 발화하는 “이미 아득한 곳”의 의미는 이미 가버린 젊음 혹은 청춘일 수도 있겠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그때, 그곳에서, 만발했던 당신과 우리들의 꽃시절. 그렇게 시인은 다시 혼자가 되었지만, 괜찮다. 누상동은 여전히 인왕산 아래 존재할 것이고. 내년에도 또 내년에도 시인은 그곳으로 꽃구경 가면 될 일이다.

손현숙 시인

◇손현숙 시인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멀어도 걷는 사람》 《너를 훔친다》 《손》 《일부의 사생활》 《경계의 도시》(공저) 《언어의 모색》(공저)
▷사진산문집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 『댕댕아, 꽃길만 걷자』
▷연구서 『발화의 힘』, 대학교재 『마음 치유와 시』
▷고려대 일반대학원 문학박사(고려대, 한서대 출강)
▷현 조병화문학관 상주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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