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의 정병욱 가옥과 망덕포구. 정병욱 가옥에 비치된 자료를 촬영했다.
현재 정병욱 가옥 모습. 사진=조해훈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위 시는 윤동주 시인의 〈서시〉전문이다.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준 윤동주 시인의 시 중 한 수이다. 그는 1945년 2월 15일, 29세의 젊은 나이로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나라의 해방을 보지 못하고 젊은 나이로 순절하였다. 그런데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는 그의 사후 3년이 지난 1948년 첫 간행되었다.

윤동주는 죽었는데 어떻게 그의 시집이 세상에 나왔는지에 대한 스토리가 있다. 이번 글에서는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물론 이 내용을 알고 있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정병욱 가옥 내부. 사진 앞에서부터 필자의 벗인 백태현과 그의 아내, 끝에 모자 쓴 이가 필자. 사진= 문화해설사

필자의 벗인 백태현 전 부산일보 논설실장 부부가 24일 경남 하동을 방문했다. 전날 진주에서 하루 묵으면서 구경한 후 필자를 보기 위해 하동으로 왔다. 필자가 살고 있는 하동 화개로 온다는 걸 “거리가 머니 내가 하동 읍내로 나갈 테니 거기서 만나 점심을 같이 먹읍시다.”라고 말했다. 낮 12시쯤 읍내 옛 ‘하동 읍민관’이 있던 인근의 일신식당에서 함께 점심을 먹은 후 필자는 전남 광양시 진월면에 있는 망덕포구에 있는 백영(白影) 정병욱(鄭炳昱·1922~1982) 가옥으로 안내했다.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윤동주 유고(遺稿)를 보존했던 가옥이다.

우리가 국문학자였던 정병욱 선생 가옥에 가니 문화해설사가 설명을 해주었다. 필자는 이달 1일인 지난 4월 1일에도 서울과 경기도, 경남 사천 등에서 온 황용섭·신애리 시인 등과 이 가옥을 방문했다.

그러면 문화해설사의 설명과 그곳에 비치된 자료 등을 참고해 이 가옥과 윤동주 시인의 유고에 대해 역시 간략하게 정리하겠다.

1922년 경남 남해군 설천면에서 태어난 정병욱은 부친인 남파(南坡) 정남섭(鄭南燮) 선생이 1925년 이곳에 점포형 주택을 건립한 후 1934년에 양조 허가를 받아 양조장을 운영한다. 정병욱은 1940년 4월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해 그곳에서 윤동주를 만났다. 윤동주가 연배였지만 두 사람은 하숙을 함께 하며 ‘마음을 주고받는 글벗’으로서 정병욱이 윤동주의 시작(詩作)에 조언을 해주는 등 우정을 쌓았다. 윤동주의 〈서시〉·〈별 헤는 밤〉·〈또 다른 고향〉등 그의 대표작들이 이 시기에 다수 씌어졌다. 이런 우정으로 윤동주는 연희전문을 졸업하는 즈음에 정병욱에게 손수 작성한 자선(自選) 시집을 증정한다.

태평양 전쟁의 전세(戰勢)가 불리해지자 일본은 조선인 청년들까지 전선으로 내몰았다. 연희전문을 졸업한 정병욱은 1944년 1월 징병으로 끌려가면서 광양의 어머니에게 윤동주의 유고를 보존해 달라고 부탁했다.

윤동주의 자선시집을 정병욱 가옥의 마루 밑 쌀독에 보관했던 모습을 재현해 관람객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사진= 조해훈

문화해설사의 설명에 따르면 정병욱의 부모님은 윤동주의 유고를 마루 밑에 쌀독을 묻고 그 독 안에 유고를 숨겨 보존했다. 당시 보존한 시는 19수였다.

광복 이후 징병에서 구사일생으로 귀환한 정병욱은 윤동주의 연희전문 동기 강처중과 함께 1948년 유고 시 31수를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정음사 간행)를 간행했다. 정병욱 가옥에서 보존한 시 19수와 윤동주가 일본에서 쓴 시를 비밀리에 강처중에게 보낸 시 5수 등 31수였다. 이로써 어둠에 묻혀있던 윤동주의 시혼(詩魂)은 마침내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

윤동주 시인 사후에 그의 연희전문 친구인 정병욱과 강처중이 1948년에 처음 발간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정병욱 가옥 내부에 전시돼 있다. 사진= 조해훈

이후 정병욱은 서울대 교수(1957~82) 및 박물관장을 역임하고, 국문학자로 우리나라 고전 시가와 문학 연구의 학문적 초석을 놓았다. 또 전통예술 전반과 함께 판소리 연구와 진흥에 힘써 ‘판소리학회’(1974)를 창립하는 등 판소리를 우리 민족예술의 정화(精華)로 자리매김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다 들은 후 필자를 포함한 세 사람은 윤동주의 자필 시(복사본)와 전시된 그의 첫 시집 등을 둘러본 후 밖으로 나왔다. 거기서 배알도(拜謁島) 앞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를 한잔씩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백태현 부부가 조만간 손주를 본다는 이야기와 사진작가인 둘째 아들이 네덜란드에서 사진 전시회를 갖는 소식을 들었다. 필자도 큰아들이 최근에 갑상선 수술을 한 이야기 등을 했다.

지난 4월 1일에 서울과 경기도 등에서 온 시인들과 필자가 정병욱 가옥에서 문화해설사(왼쪽 첫번째)의 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 오른쪽 첫번째가 황용섭 시인, 두 번째가 필자, 세번째가 신애리 시인. 사진 = 서울서 온 모 시인

그런 다음 다리를 건너 천천히 배알도 쪽으로 갔다. 다리 아래는 전북 진안에서 발원해 500리나 흘러온 섬진강이 남해와 만나는 지점이다. 배알도 정상의 정자에 올라 풍광을 바라보다 하동 읍내로 와 백태현 부부와 작별 인사를 한 후 헤어졌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