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 에레리아스 마을에서 하루 묵었던 알베르게에서 나오니 발가락이 붉은색으로 표시된 독특한 산티아고 표지판이 있다. 사진= 조해훈
오늘은 2024년 11월 18일 월요일이다. 어제 라스 에레리아스(Las Herrerias) 마을의 2층 숙소에서 잠을 자다가 밤에 또 편두통 때문에 견딜 수 없어 두통약 한 알을 먹었다. 그래도 두통이 멈추지 않아 새벽에 한 알을 더 먹었다.
아침 8시가 못 돼 배낭을 챙겨 1층 카페로 내려갔다. 카페에는 빵도 없는 데다 커피와 먹을거리가 변변찮았다. 커피만 한 잔 주문하여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글 쓸 게 좀 있었다. 오전 9시가 좀 넘으니 가끔 순례자 한 두 명이 지나가는 게 보였다. 그런데 아는 사람은 없었다. 커피 한 잔 시켜놓고 계속 앉아 노트북 작업을 하기가 뭣해 오전 10시 반쯤 커피 한 잔을 더 주문했다. 그렇게 커피 한 잔을 더 마시며 글을 쓰다 오전 11시 55분쯤 신문사에 원고를 전송한 후 배낭을 챙겨 카페 바깥으로 나왔다.
라스 에레리아스 마을의 사람이 살지 않는 2층 건물. 가게를 해도 될 구조의 건물인데 비어있다. 사진= 조해훈
어제 저녁 식사하였던 바(Bar)를 향해 조금 가니 눈에 띄는 산티아고 표지판이 있다. 표지판에 있는 다른 문양은 그동안 본 것들이어서 별 다른 건 없는데 발바닥 문양이 있다. 발가락 다섯 개가 빨간색으로 표시돼 있다. 아마 여기까지 순례길을 걸어오느라 발가락에 물집이 잡히거나 문제가 있을 수 있으니 더 신경을 쓰라는 뜻으로 필자는 해석했다.
이곳 ‘라스 에레리아스’ 마을은 ‘카미노 닌자’ 앱에 따르면 해발 680m이다. 지대가 낮은 지역이 아니나 주변의 산들이 워낙 높아 상대적으로 푹 꺼진 마을로 느껴진다. 어제 저녁을 먹었던 바의 방향으로 걸었다. 마을 건물들은 주로 길 왼쪽에 있다. 오른 편은 경작지와 물길이다. 5분가량 걸으니, 왼쪽에 2층짜리 집이 있는데 사람이 살지 않는다. 가게를 해도 될 법한 집 구조를 가졌는데 비어 있다.
마을을 벗어나자 초지에 소 네 마리가 누워 쉬면서 필자를 쳐다보는 것 같다. 사진= 조해훈
오른편 초지에 소 네 마리가 한가로이 있다. 세 마리는 느긋하게 앉아 있고, 한 마리만 풀을 뜯고 있다. 이 마을에 순례자들이 아니면 거의 방문객이 없을 것 같다. 마을이 휑한 느낌이다. 대부분 건물은 비어 있다.
낮 12시 9분, 마을을 벗어난다. 이 지점에 있는 건물들도 비어 있다. 여하튼 하루 묵었던 ‘라스 에레리아스’ 마을을 통과했다. 마을을 벗어나자 또 다른 초지에 소 네 마리가 앉아 있다. 소들은 필자를 보는 것 같다. 마치 “웬 낯선 동양인이 혼자 저렇게 느릿느릿 갈까?”라는 눈빛으로 말이다.
낮 12시 22분, 작은 다리를 지나 좌회전 해 아스팔트 포장길을 걸어 올라간다. 사진= 조해훈
낮 12시 16분, 앞에 집이 몇 채 있다. 여기는 사람들이 사는 것 같다. 길 왼쪽 밭에서 한 할머니께서 손수레에 물건을 담고 계신다. 마음 같아서는 도와드리고 싶으나 괜한 오해를 살 수도 있어 인사를 하곤 그냥 지나쳤다. 집이 몇 채 더 이어지다 결국 마지막 부분에 있는 집들 역시 빈 집이다. 마음이 씁쓰레하다.
낮 12시 20분, 길이 두 갈래인데 표지판은 아래로 가라고 가리킨다. 2분 더 가니 크지 않은 다리가 나오고 다리를 건너자마자 정면에 2층짜리 건물이 있다. 여기서 좌회전한다. 오르막이다. 산속 길로 얼마 전에 아스팔트로 포장된 좁은 왕복 1차선 도로이다. 구불구불 올라가는 도로는 틀림없이 산 능선으로 향해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지나는 차량은 한 대도 없다.
낮 12시 22분, 녹슨 철판 모양의 중세 순례자 모형이 있다. 사진= 조해훈
낮 12시 29분, 왼편에 철판을 오려 만든 중세 때 모습의 순례자 문양이 있다. 지나는 사람 한 명, 지나는 차 한 대 없는 깊은 산 속에서 순례자 문양을 만나니 그래도 반갑다. 길을 잘못 든 것은 아니라는 안도감이 든다. 순례자 문양은 부분적으로 녹슨 느낌이 든다. 실제로 녹이 난 것인지, 아니면 그런 느낌이 들도록 제작됐는지는 알 수 없다.
낮 12시 51분, 포장길을 버리고 왼쪽 비포장 숲길로 가야한다. 사진= 조해훈
길 양쪽의 숲은 사람의 손길이 그다지 닿지 않은 것 같다. 숲이 깊다. 길이 산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왼쪽은 점차 낭떠러지이다. 저 아래 골짜기가 점점 깊어진다. 골짜기 저 아래에는 계곡이 흐르고 있다. 쳐다보니 아찔하다.
낮 12시 51분, 포장길을 버리고 왼쪽으로 비포장길 숲으로 들어가라고 표지판이 가르쳐 준다. 숲으로 들어가니 흙길이다. 최근에 비포장길을 정비했는지 깔끔하게 돼 있다. 길에는 낙엽이 수북하게 깔려 있다.
오후 1시 2분, 누군가가 이끼 낀 나뭇가지로 산티아고 방향으로 화살표를 만들어 놓았다. 사진= 조해훈
오후 1시 2분, 길바닥에 누군가가 이끼 낀 나뭇가지로 화살표를 만들어놓았다. 누가 했든 간에 아무도 없는 산중에 사람의 손길이 느껴져 반갑다. 길은 계속 오르막이다. 필자보다 앞서 순례자들이 이 길을 많이 걸었을 터인데 사람의 흔적이 별로 없다. 오르막길이지만 이런 길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심하고 돌길이 많은 지리산 능선길에 비하면 완만한 산책로(?) 수준이다. 단지 사람이 한 명도 없어 좀 그렇다. 순례길이 맞으므로 걱정할 필요는 없다. 점점 경사가 심해지고 길에 낙엽이 많다.
계속 오르막길이다. 사진= 조해훈
왼쪽에 낭떠러지도 더 아래로 보인다. 갈수록 산이 깊어지니 겁이 조금 난다. 혹시 곰이라도 나타나면 어떻게 하나 싶다. 곰을 조심하라는 경고문은 본 적이 없으니 아마 곰은 없을 테지? 그래도 너무 으슥하다. ‘이런 곳에 작은 카페라도 하나 있으면 커피를 마시며 좀 쉬었다 가면 좋을 텐데.’라는 생각이 든다. 순전히 필자 혼자의 생각이다. 이 깊은 산중에 카페를 만들면 누가 운영할 것인가? 말이 안 되는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오후 1시 37분, 길옆에 닭장 같은 자그마한 움막이 하나 있다. 물론 움막에 사람은 살고 있지 않으나 조만간 마을이 나타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움막을 지나니 경사가 더 급격해진다.
오후 1시 43분, 집 몇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라 파바' 마을이다. 사진= 조해훈
오후 1시 43분, 거짓말처럼 집이 보인다. 집이 몇 채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아주 작은 마을이다. 마을 중앙에 하나뿐인 알베르게와 바 표지판이 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164.5km 남았다는 표식도 그 표지판 옆에 있다. 마을 이름이 ‘라 파바’(La Faba)이다. 마을 표지판도 있다. 알고 보니 이 마을은 밤나무 숲속의 마을로 알려져 있다. 바는 문이 닫혀 있다.
'라 파바' 마을의 한 카페 앞에 있는 한글 표지판. 그 앞에서 기다렸으나 결국 주인을 만나지 못했다. 사진 = 조해훈
그런데 여기서 조금 돌아가니 한국어로 된 표지판이 있다. ‘차, 채식주의 쉼터 봉사자를 찾고 있어요! 부엔 까미노’라고 김이 나는 찻잔과 함께 붉은 글씨로 적혀 있다.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카페인가 싶어 들어가 보니 사람이 없다. 잠시 나갔을까? 밖에 서서 한참 기다려도 주인이 나타나지 않는다. 할 수 없이 이 집을 나와 옆으로 난 포장도로로 걸었다. 도로 아래 역시 낭떠러지이다. 아마 옛사람들은 이런 낭떠러지를 보았다면 ‘천 길 낭떠러지’라고 표현했을 것이다.
도로 아래의 낭떠러지. 사진= 조해훈
도로를 따라 제법 걸었다. 오후 2시 14분이다. 그런데 기분이 이상했다. 저 멀리 산 위로 도로가 이어졌다. 아무래도 이 길이 아닌 것 같다. 이제는 감으로 대충 느낀다. 다시 마을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허탈한 심정으로 한글 간판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왔다. 한글 간판이 있는 집에서 바로 앞쪽으로 골목이 하나 있다. 그 골목 들어가는 입구에 파란색 쓰레기통 2개가 놓여있다. 쓰레기통에 누군가 페인트로 표시한 것인지, 아주 작은 노란색 화살표가 있다. “이 길로 가세요.”라는 표지이다. 헷갈리지 않게 좀 큰 표지판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쓰레기통에 표시된 화살표를 보지 못하고 길을 잘못 들어 되돌아왔다. 화살표가 가리키는 골목으로 들어갔다. 사진= 조해훈
그 골목을 지나가니 다시 산길이 시작되는 곳에 순례길을 가리키는 큰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이 큰 표지판이 골목 입구에 있어야 할 것 같다. 오후 2시 33분, 또 오르막길을 오른다. 여기도 역시나 낙엽길이다. 오후 2시 40분, 이제 산 능선길이다. 저 멀리 산의 구릉이 쭉 펼쳐져 있고, 그 위로 하늘에 뭉게구름이 떠 있다. 산 능선 옆에 목초지가 있다. 지대가 1,000m는 될 것 같다. 필자는 지리산에 사는 데다 산행을 워낙 많이 한 편이어서 대충 해발 몇 m인지 가늠하는 편이다.
산꼭대기로 계속 걸어올라가야 한다. 사진= 조해훈
그런데 또 오르막이다. 아무래도 이 산맥의 꼭대기로 올라가는 모양이다. 주변에 나무가 없어서인지 길바닥에 낙엽 대신 돌이 많아 자꾸 미끄러진다. 경사가 심해 저 앞은 보이지 않는다. 오르막이 끝이 없는 것 같다.
오후 3시 9분, 마침내 저 앞에 고갯마루가 보인다. 오후 3시 19분, 고갯마루를 넘어가던 한 순례자 앞으로 개 두 마리를 앞세운 트랙터가 내려왔다. 순례자가 트랙터를 세워 무슨 이야기를 한다. 이야기를 끝낸 트랙터가 필자 옆으로 지나간다. 돌길이어서 트랙터가 내려오느라 뒤뚱 뒤뚱거린다. 또 오르막이다. 무슨 경사가 이리도 계속 이어진단 말인가? 저 앞에 올라가는 순례자가 힘든지 스틱을 짚고 쉬고 있다. 남자인 줄 알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여성 순례자다.
저 앞쪽에 한 순례자가 트랙터를 몰고 내려오는 한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 조해훈
3시 23분, 소를 키우는 마을이 나타났다. 소똥 냄새가 지독하게 나는 축사 앞을 지난다. 길에는 온통 소똥이다. 축사 마당에는 트랙터와 승용차가 세워져 있다. 거길 지나니 카페가 있다. 이 산꼭대기에 카페가 있다니? 이 카페를 포함해 마을에는 집이 세 채밖에 보이지 않는다. 일단 카페에 들어갔다.
오후 3시 23분, 소똥 냄새가 많이 나는 '라 라구나'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의 한 축사 앞에 트랙터와 승용차가 주차해 있다. 사진= 조해훈
마을의 한 할아버지께서 맥주를 드시고 있고, 그 옆에 할머니와 며느리가 앉아 나직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필자는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렸다. 그러자 연세가 아주 많아 보이는 할아버지께서도 인사를 하신다. 커피를 들고 건물 바깥에 앉아 주변 풍광을 보면서 마셨다. 좀 있으니 며칠 전 알베르게에서 만났던 남아프리카공화국 아저씨가 도착해 필자 옆 의자에 앉았다. 안면이 있는 터라 서로 웃으며 인사를 나눴다. 그는 맥주를 한 잔 주문해 필자 옆에서 마셨다.
필자는 지리산 중에서 깊은 골인 화개동(花開洞)에 사는지라 이런 산골 풍경이 낯설지 않고 오히려 정겨웠다. 온 데서 풍겨오는 소똥 냄새도 싫지 않았다. 일흔쯤 되어 보이는 카페의 주인아저씨는 무뚝뚝하나 정이 많아 보였다. 그리하여 ‘오늘 이곳에서 하루 묵어도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뜸을 좀 들이다 주인아저씨에게 “혹시 하루 묵을 방이 있습니까?”라고 물으니, 아저씨는 “예. 2층에 있습니다.”라고 했다. “저녁 식사도 됩니까?”라고 또 물으니, 아저씨는 “에. 가능합니다.”라고 하셨다. 그리하여 2층 알베르게로 올라갔다. 방이 두세 개 있는데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짐을 풀고 샤워를 한 후 좀 쉬었다가 저녁을 먹을 생각으로 오후 7시 10분쯤 1층 카페로 내려갔다. 인근에서 공사를 하는 분들이 카페에 와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또 남아공에서 온 아저씨를 포함해 세 명의 순례자도 테이블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남아공에서 온 아저씨가 다른 두 명의 순례자에게 필자를 소개했다. 그러자 두 사람은 “함께 동석하시죠?”라고 했다. 그리하여 필자는 합석했다. 이들과 같은 테이블에서 저녁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이들 세 사람도 이 알베르게에서 오늘 하루 묵는다고 말했다.
산꼭대기인 '라구나' 마을의 알베르게 1층 카페에서 함께 식사한 외국 순례자들. 왼쪽부터 네덜란드인 에르윈(50), 필자, 남아공인 로버트(54), 스웨덴 여성 린다(39). 이날 이들과 한 방에서 함께 잤다. 사진= 알베르게 주인아저씨
이들 네 사람은 네덜란드에서 온 에르윈(Erwin·50), 남아공에서 온 로버트(54), 그리고 스웨덴에서 온 여성인 린다(Linda·39)였다. 1층 카페에서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저녁 8시 반쯤 2층 방으로 올라갔다. 모두 한 방에 잔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린다가 바닥에 요를 깔고 요가를 했다. 그러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명상에 들어갔다.
린다의 그런 동작을 보면서 필자를 포함한 남자 세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필자는 린다에게 “혹시 불교에서 하는 108배를 아십니까?”라고 물었고, 린다는 “모릅니다. 가르쳐 주세요.”라고 했다. 그리하여 필자가 108배 동작을 보여주니, 에르윈이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라며 108배 동작을 하는데 잘했다.
세 명의 순례자 모두 사람이 좋았다. 그렇게 밤 10시까지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필자는 ‘이 산꼭대기에 나 외에 잠을 잘 다른 사람이 있을까?’라고 생각했는데, 마침 각국에서 온 인성 좋은 사람들과 한방에서 잠을 자게 된 것이다. 이 마을은 해발 1,151m였다. 이들 세 사람은 에티켓도 좋아 혹여 타인에게 조그만 피해라도 줄까 봐 무척 신경을 썼다. 필자 역시 같은 입장이었다.
오늘은 ‘라스 에레리아스(Las Herrerias)’에서 ‘라 라구나(La laguna)’까지 5.7km를 걸었다. 연박(連泊)한 것 외엔 하루에 가장 짧은 거리를 걸었다. 생장에서는 총 613.4km를 걸었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