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의 삶, 사람의 향기】 문정현 서봉리사이클링 회장 - 우리들의 녹색 백만장자1

박 창희 승인 2023.01.01 11:54 | 최종 수정 2023.01.15 12:03 의견 0

한 사람의 생애는 자연스럽게 사회적·인문적 궤적이 그려진다. 그 궤적은 아름다운 삶의 무늬가 되기도 하고, 당대 또는 후대의 거울이 되기도 한다. 삶의 풍경과 기억은 기록될 때 진정한 의미로 남는다. 인저리타임은 2023년 새해를 맞아 열정적인 삶을 산 지역의 인물을 찾아 그 사람의 향기를 전한다. <편집자 주>

문정현 서봉리사이클링 회장

1. 낙동강 델타에 핀 민초

 

#걷는 사람

사람을 만나는 일이 반갑지만은 않은 시대에도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일상을 짓누르는 코로나19가 사람 만나는 문화를 바꿔놓았지만, 만남과 소통의 본질을 바꿔놓지는 못한다. 만나는 상대방이 유쾌한 인본주의자, 걷기꾼, 나눔과 상상력으로 충만한 자, 지칠 줄 모르는 에너자이저라면 만나고 싶어진다. 그땐 사람을 만나는 일이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 된다.

나의 오랜 지인(智人) 서봉리사이클링 문정현(文正見) 회장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그는 제법 규모가 큰 건설폐기물 재생업체의 회장이다. 회장? 거추장스럽다. 그냥 정현이라 부르자. 그게 열린 대화에 도움이 될테다.

그날도 정현은 걸어서 왔다. 회사나 집에서 왔다면 족히 6~7㎞는 될 거리. 도시철도, 버스, 자가용 다 외면하고 걸어서 왔단다. 그에게 걷기는 살아있음의 존재 증명이요, 살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그는 걸으면서 어제를 반추하고 오늘을 생각하고 내일을 준비한다. 기업인으로서 당연히 돈 벌 궁리도 하지만, 돈 쓸 궁리를 더 많이 한다. 그리고 늘 상상하고 꿈꾼다.

정현은 에너자이저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사람이다. 늘 상상하고 생각한다. 움직임이 빠르고 민첩하다. 무슨 일을 하든 공의(公義)를 우선에 두고 움직인다. 그가 말하는 공의는 정치적 언어가 아니다. 삶속에서 부딪히는 공정과 의리다. 의리에 죽고 사는 경상도 사나이의 기질이 그에게 있다. 의리가 짓밟히는 것은 못 참는다.

정현의 가슴에는 유쾌한 돈키호테가 사는 것 같다. 환상과 현실이 뒤죽박죽이 되어 기상천외한 사건을 불러일으키는 돈키호테. 다소 무모해 보일지라도 포기나 불가능은 없다. 그의 사전엔 매너리즘 같은 건 없다. 정현은 매너리즘에 빠진 인간을 싫어한다. 똑같은 길, 뻔한 길, 가나마나한 길은 차라리 안 간다. 그래서 부서지기 쉽고, 부서지기도 했을 것이다. 그 갈피를 세상이 이해하지 못해도, 그는 환대하고 수용하는 마음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차를 생활화 하고 있는 문 회장 

#백발 속에 핀 함박꽃

2022년은 그에게 뜻깊은 해다. 얼마 전 생일을 맞고 보니 칠순이다.

“내가 고희라…. 나이값인지 모르지만 편하게 받아들여져요. 고맙지. 살아온 게 고맙고 이만큼 걸을 수 있다는 게 고맙지. 내가 복은 타고 났어요. 작으나마 벌 수 있고 나눌 수 있어 고맙지. 이게 대복이 아니고 뭔가?”

정현의 머리와 가슴엔 그가 지금까지 끌고 온, 계속 풀어갈 몇 가지 화두가 있다. 사람다움과 공의(公義)로움, 문화주의와 공동체, 그리고 의미있는 나눔이 그것이다. 한갓 건설폐기물 처리업체를 운영하며 비록 크게 번 것은 없지만, 모자라지 않을 만큼 쓰면서 큰 욕 안먹고 살았으니 잘산 셈이다. 기업인으로서 세속적인 잣대를 들이대면 절반의 성공한 삶일지 모르지만, 갈 길을 정해놓고 나눔을 실천하며 하고 싶은 일을 했다는 점에서 그는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문정현, 지칠 줄 모르는 에너자이저, 우리들의 유쾌한 돈키호테. 그가 걸어온 칠십 평생의 삶과 꿈, 만듦과 이룸의 궤적을 따라가 본다.

 

#호기심 많은 ‘아싸리’ 소년

문정현은 1953년 5월 8일 부산 강서구 대저1동 318-2번지에서 아버지 문홍복, 어머니 김인자의 4남 2녀 중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구포 농산물검사소 공무원(소장)으로 시골에선 다소 유복한 집안이었다.

어릴 적 정현은 다소 별났다. 어린 아이답지 않게 세상 일들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다. 초등학교는 아버지의 직장이 있는 부산 북구 구포초등학교에 다녔다. 구포초등학교는 1907년 1년제 사립 구명학교로 출발해 115년 전통을 쌓은 북구지역 명문이다.

초등학교 시절, 정현은 개구쟁이면서 반항아였다고 한다. 하고 싶은 건 핀잔을 듣고서라도 해야 했다. 어릴 때는 고향집에서 멀지 않은 강서구 대사리 외갓집을 자주 들락거리며 놀았다. 그가 놀았던 곳은 바로 낙동강의 대 삼각주, 델타지역으로 낙동강 하구의 자연과 농경, 삶이 어우러지는 곳이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은 초등 4학년 때부터 표출된 듯하다. 고향집 우물가나 외갓집에 가서 사람들이 모이면 세설(世說), 즉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줄줄 읊었다고 한다. 지인들은 “어린 게 잘 하네 하니 더 잘 하는 아이”였다고 술회한다.

중학교는 부산진구 가야동에 자리한 개성중학교를 나왔다. 중학시절은 그야말로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대단히 빠르게 불어오는 바람과 미친 듯이 닥쳐오는 파도가 정현의 청소년기를 강타했다. 초등 시절은 물론 중학 2학년 때까지 우등생 대열에 있던 정현은 어느 날 공부와 담 쌓은 문제학생으로 변해갔다.

부친은 정현이 법학대학에 진학해 세상의 정의를 세우는 검사가 되길 은근히 희망했다. 그렇게 키우려 애썼던 아버지의 바람은 정현이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사실상 조각이 나버렸다. 중학교 입학할 때 전교 10위 안에 들었던 정현의 성적은 졸업할 무렵 끝에서 10위로 쳐져 있었다.

학창시절 정현의 별명은 ‘아싸리’였다. 네이버 오픈사전에는 ‘아예, 그럴 바에는, 그것보다’를 뜻하는 경상도 사투리로 풀이돼 있다. 일본어의 앗싸리(あっさり: 깨끗이, 간단히, 시원스레)에서 나온 말일 수도 있다. 경상도에서 ‘아싸리’는 ‘차라리 속시원하게’ ‘지면 깨끗이 승복한다’는 의미가 있다. 지금도 유년기의 친구들은 정현을 만나면 ‘아싸리’라 부르며 정겨움과 친근함을 표현한다. 하고 보면, 정현의 사업과 사회활동이 ‘아싸리하다’는 느낌을 준다. 별명이란 게, 말이란 게 묘한 구석이 있다.

그후 사회활동을 하면서 얻은 별명은 ‘갯버들’이다. 한자로는 ‘해정(海檉)’이다. 평생 낙동강과 함께 살아온 고 김상화 선생이 붙여준 별명으로, ‘해’는 김해(대저) 출신을 뜻하고 ‘정’은 거룩한 나무를 의미한단다. 많이 부르고 쓰이지는 않지만, 김상화 선생만은 꼭 ‘해정 선생’이라 부르곤 했다. 두 분의 친분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문정현 회장

#학창시절 ‘씨ᄋᆞᆯ의 소리’ 읽어

중학교를 마친 정현은 곧바로 진학하지 않고 잠시 방황한다. 방황? 그건 어른들의 관점이고, 자신에겐 길을 찾는 시간이었다. 중학 졸업후 2년간 방황은 그의 인생 행로에 있어 중요한 변곡점이다. 중3 때 갑자기 공부가 하기 싫어지면서 정규학교가 아닌 ‘내식대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진학 포기! 부모 입장에서 속이 뒤집어질 노릇이었으나, 본인이 싫다는 것을 완력으로 강제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정현이 완전히 공부와 담을 쌓은 것은 아니었다. 중3 때 신흥종교인 여호와의 증인에 눈을 뜨면서 지식 습득의 필요성을 느꼈고, 우연히 책방에서 함석헌 선생이 펴내던 ‘씨ᄋᆞᆯ의 소리’와 장준하 선생이 만든 월간 종합교양지 ‘사상계’를 발견하고 읽었다. 이들 책은 지식 수준이 꽤 높아야 읽을 수 있는 교양잡지다. 고등학생 신분으로 그런 책을 읽었다는 것은 그 시점, 정현이 사회의식에 눈뜨고 있었다는 말이다. 기업가로서 정현의 다방면 지식 편력(遍歷)은 이때 DNA가 형성되고 ‘씨ᄋᆞᆯ’이 박힌 것 같다.

고교 진학을 포기한 정현은 어머니를 도와 농사일에 뛰어들었다. 이때 부친은 직장을 거제도로 옮겼다. 구포에 근무할 때는 관사 생활을 했는데, 부친이 거제도로 발령나자 다시 대저동 본가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를 도와 농사를 지어보겠다고 마음먹은 정현은 강서구 대저2동 본가 근처의 농토 900여 평에 토마토 농사를 시작했다.

“이게 김해평야 하우스 재배농의 시작이지. 나이 어린 게 간이 컸지. 일정 크기의 토마토 나무에 지주를 세워서 모종을 키우고 초봄이 되면 그것을 노지로 옮겨 비닐을 씌워 5월쯤 수확을 했어요.”

토마토와 함께 쌀 농사도 두어마지기 지었다. 경험도 없이 시작한 토마토 농사가 잘 될 리 없었다. 하지만 정현의 때이른 농사경험은 이후 사회생활과 기업활동의 든든한 밑천이 되었다. 뭐든지 하면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배양한 건 보이지 않는 수확이었다. (계속)

<글·사진 = 박창희>

<경성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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