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눔의 추억과 힘겨웠던 군시절
#촌놈 의리
학창시절로 돌아가자 정현은 어린 아이처럼 해맑아져서 김해농고 시절 잊지 못할 기억 한 토막을 불러냈다. 아련하면서도 통쾌한 추억이었다. 얘기인 즉 이랬다.
고교시절 정현의 집은 아버지가 공무원이라 그래도 살만했는데, 주변에는 못사는 친구들이 많았다. 고2 때 수학여행을 갈 때였다. 함께 가야 할 수학여행을 돈이 없어 못가는 한 친구가 있었다. 그걸 본 정현은 자신의 여행비를 그 친구 여행비로 내주었다. 소문 내지 않으려 다른 친구를 시켜 대납했다. 그러고는 막상 자신이 여행을 못갈 처지가 되자 선생님을 찾아가 주제넘게 통사정을 했다.
“샘요, 저도 가고 싶은데 사정이 있어 여행비를 못낼 처지입니다. 제발 꼽사리 끼게 해 주이소. 집에는 이야기하지 말고예. 나중에 여행비는 갚겠심더.”
선생님은 기가 차서 정현을 쳐다보더니, “고놈 맹랑하네”라며 꼽사리를 허락했다. 그때의 통쾌한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두드리니 문이 열렸다.
비슷한 상황은 또 있다. 고3 졸업을 앞두고 앨범을 제작하고 찾을 때였다. 형편이 어려운 한 친구가 앨범값을 내지 못해 앨범을 갖지도, 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정현이 친구에게 다가가 “친구야, 이거 학교에 남은 거라고 하더라. 니가 가져가라”하고 앨범을 건넸다. 그렇게 해놓고 정현은 또 선생님을 찾아가 “샘, 앨범을 잃어버렸심미더. 여분 있으면 한 권만 주이소. 전 앨범이 필요합니더”하고 선생님을 설득해 뜻을 이루어냈다.
이걸 보면 학창시절부터 정현에겐 나눔 인자가 있었던 셈이다. ‘촌놈 의리’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정현은 “내가 니꺼 내꺼 개념이 좀 없지. 학창시절 멋모르던 나눔의 추억을 생각하면 지금도 통쾌해요”라며 한바탕 크게 웃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친구들을 보면 저절로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 발동했다. 남들보다 집안 살림이 조금 나은 이유도 있었지만, 함께 같이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러면서도 푯대는 내지 않았다. 도움받는 친구가 자격지심을 느낀다면 그건 도와주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경우에 없는 짓이나 불의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내가 키는 작아도 학교 다닐 때부터 깡다구가 좀 있었지. 더러운 꼴을 못봤으니까. 허허.”
#공수부대서 배운 깡다구
학교 공부는 등한시했지만 지식에 눈감고 지낸 건 아니었다. 농고 시절부터 본 ‘씨ᄋᆞᆯ의 소리’나 ‘사상계’를 읽었고, 여타 사회과학 서적을 관심있게 보았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지식이 아니라 스스로 하고 싶은 공부를 한 셈이다. 중학교 때 문득 공부가 하기 싫어져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선택한 정현. 세상은 정해진 길 대신 자기 길을 가려는 사람에게도 지식과 지혜 습득의 길을 열어주었다.
고교 졸업 후 정현은 잠시 집안 일을 거들다 군대에 갔다. 1974년 6.25~77년 4.19. 정현의 군 복부 기간이다. 날짜가 공교롭게도 6.25와 4.19이니 잊혀지지도 않는다. 군생활을 한 곳은 경기도 김포의 공수부대. 창원에서 10주 교육훈련 받고 자대생활이 시작되었다. 자대에 가서는 공수교육을 받았다. 정현은 공수교육 110기였고, 그 뒤에 문재인 전 대통령이 126기였다. 당시 전두환이 1공수 여단장이었다.
군대생활은 평탄치 않았다. 군생활 하면 지금도 떠오르는 것이 군기, 짬밥, 배고픔, 빳따, 사격 등의 단어다. 군기가 세서 청춘들이 많이 때리고 많이 맞던 시절이었다. 밥이 시원찮아 늘 배가 고팠다. 사격은 왜 그렇게 잘 안 됐는지, 지금 생각해도 귀가 멍멍하다. 영점을 못잡아 쪼그려뛰기, 얼차려도 많이 받았다.
창원 훈련소 시절의 기억 한토막.
“내가 군대시절 고문관 짓을 좀 했지. 훈련소 있을 때는 좀 편하게 지낸 것 같은데, 그게 우리 형님 덕분이지. 창원에서 훈련을 받고 있는데 형님이 아는 사람 편으로 내게 잡비로 쓰라며 3천 원을 보내 주더라고. 그때만 해도 고달픈 훈련병들은 PX 가서 빵도 제대로 못 사먹었지. 돈이 없었고 사먹더라도 누가 빼앗아 먹을까봐 혼자서 돌아앉아 먹곤 했지. 꼴짭하게 같이 나눠먹지 않는 동료들이 원망스러웠지. 그러던 중 3천 원이란 거금이 생겨 그 돈으로 통크게 PX를 털다시피 하여 내부반에서 회식을 했지.”
정현이 내무반에 한턱을 쏘자 그때부터 내부반장이 정현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이건 숫제 돈의 힘이 아니라 나눔의 위력이었다. 고교시절 친구의 수학여행비를 대주고 앨범 값을 대신 내던 상황과 비슷하다. 정현의 나눔 인자는 이후에도 필요한 순간에 언뜻언뜻 발현된다.
#빳따 맞으러 군대 왔나?
군 생활 중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 것은 빳따에 대한 악몽이다. 70년대 군대는 규율이 엄격하고 군기가 셌다. 군기를 지탱한 것은 빳따와 집단 얼차려 같은 기합이었다. 자유분방함을 추구하고 남의 눈치를 거의 안보는 정현에게 군대는 억지로 껴입은 옷과 같았다. 가끔씩 고문관 짓을 했어도 농고 출신답게 누구보다 근면 성실하게 군대생활을 했지만, 일상화된 비인간적 처사와 툭하면 등장하는 빳따는 참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자대 생활은 고달팠다. 우선 배가 고팠고, 군기잡기 명목으로 행해지는 빳따는 훈련소 때보다 더 심했다. 거의 밤마다 빳따였다. 그러던 중 기어이 사고가 났다. 그날도 저녁에 집합이 있었고, 선임들의 줄 빳따가 이어졌다. 어느 날보다 강도가 셌다. 정현은 이를 악물고 맞았고, 그러다 치밀어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때리는 선임병에게 “내가 시바 나라 지키러 왔지. 맞으러 왔나? 군대 진짜 ×같네”하면서 울분을 폭발시켰다.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려는 순간 선임병의 야구방망이가 날아들었다. 퍽퍽! 선임병이 눈을 부라리며 옆에 놔둔 야구방망이를 들고 정현의 척추 아래 엉치 부위를 내리쳤다. 맞는 순간 사고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정현은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천만 다행으로 엉치뼈를 살짝 비켜난 부위였다. 비명과 신음이 뒤섞인 상태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고, 때린 선임도 식은 땀을 흘리며 정현을 부축해 내부반으로 데리고 갔다.
그때 사건으로 정현은 두 달간 의무실 신세를 져야 했다. 부모님이 걱정할까봐 집에 연락은 하지 않았다. 고통이 컸으나 정현은 빳따 친 선임을 문제 삼지 않았다. 때린 선임이나 맞은 자신이나 모두 ‘×같은 대한민국의 군인’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정통으로 엉치를 맞았다면 병신이 되었을거야.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순간이지. 맞은 부위는 함몰이 된 것 같아요. 요즘도 흐린 날이면 맞은 부위가 욱신거리고 안좋아요. 그래서 계속 등산하고 걷기운동을 하지.”
정현에게 그 빳따 사건은 오랫동안 알게 모르게 트라우마로 작용했다. 무슨 일을 할 때 앞장 서길 좋아하던 정현이 어느 날부터 2선으로 빠지거나 한발 뒤로 물러서 있었던 것이다. 79년 부마항쟁 때나 87년 민주화운동 때도 그랬다. ‘독재 타도!’를 외치며 격렬한 시위를 할 때도 그가 서 있는 곳은 일선이 아니고 2~3선이었다. 시위때 몸을 사리고 조심하는 버릇도 생겼다. 요즘도 그는 어느 순간 멈칫거리는 자신을 발견하고 “내가 왜 이러지?” 스스로 묻기도 한다. (계속)
<경성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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