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칠순을 고래(古來稀), 고희(古稀)라고 했다. 인생칠십 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 사람이 일흔 살 까지 사는 일이 예로부터 드물다는 뜻이다. 그런데 요즘 생각해보면 칠순까지 ‘제대로 사랍답게’ 사는 사람이 드물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지인 가운데 한 분인 어느 ‘녹색 백만장자’의 칠순잔치가 있었다.
보통 칠순잔치라고 하면 칠순을 맞아 본인이나 직계가족이 친지들을 초대해서 잔치를 베푸는 날이지 않는가. 한평생 자신이 가족과 지인의 도움으로 고맙게, 건강하게 살아온데 감사하는 뜻에서 한번 베푸는 날이고 지인들로부터 장수 축하를 받는 생에 참 귀한 자리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번 칠순잔치는 서른 명 정도 되는 지인들이 한 두 달 전에 뜻을 모아 비밀리 준비위를 만들고, 십시일반 경비를 갹출해 이 ‘녹색 백만장자’에게 칠순잔치를 베풀었다.
이 칠순잔치의 주인공은 서봉리사이클링(주) 문정현 회장이다. 지난 5월 16일 오후 부산 금정구 남산동 요산문학관의 요산 생가 대청마루와 마당에서 문 회장의 칠순잔치 모임이 소담하게 이뤄졌다. 해는 기와집 중턱을 넘어가고, 주변에 나무들이 그림자를 만들었다. 생가 문틀에는 ‘언제나 청년, 우리들의 녹색 백만장자 문정현 서봉리사이클링 회장 칠순기념 행사’라는 걸개막이 붙었다. 이곳을 잔치마당으로 삼은 것은 이 모임을 준비한 사람들이 이 ‘녹색 백만장자’ 문 회장이 요산문학관을 지을 당시 했던 ‘덕행(德行)’을 잊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날 행사에서 참석자들은 문 회장에게 ‘언제나 청년, 우리들의 녹색 백만장자’라는 칠순 기념 문집을 헌정했다. 이 문집은 문 회장의 오랜 지인인 박창희 경성대 교수가 인터뷰를 통해 정리한 문 회장의 약전(略傳)과 지인들의 ‘내가 본, 내가 기억하는 문정현’, 그리고 ‘언론에 비친 문정현 선생’ 등으로 짧은 기간에 발품을 팔아 만들어졌다.
문정현 회장의 약력은 대략 이렇다. 1953년 강서구 대저1동 출생. 1961년 구포초등학교 졸업. 1966년 김해농고(현 김해생명과학고) 졸업. 1974~77년 군 복무(공수부대). 1978년 가톨릭농민회 활동, 부산양서조합 가입. 1981년 결혼(부인 진기순). 1994년 서봉리사이클링(주) 창립. 1999년 낙동강공동체 낙동강살리기 캠페인 참여. 2001년 온천천살리기운동 전개(부산시장 표창). 2007년 ‘아트팩토리 숨’에 1천여평 예술활동 공간 제공. 2007년 요산문학관 지원(2회에 걸쳐 2억6천만원). 2008년 ‘아트팩토리 인 다대포’(레지던스 및 예술공간 전면 확대, 아트팩토리 숨 포함 현금(6억원) 포함 현물 20억원 상당 지원). 2009년 (사)걷고싶은부산 이사 참여. 2012년 기장군 철마면 고촌리로 공장 이전. 2018년 (주)명송 설립(김해 한림면 폐기물처리공장). 2019년 ATC(아시아트레일즈콘퍼런스) 집행위원장. 2020년 (사)부산걷는길연합 후원(5천만원) 등.
문정현은 김해농고를 졸업한 뒤 1970년대 말부터 함석헌, 장일순 선생의 강연과 책을 읽으면서 사회의식을 갖게 됐고 1980년을 전후해 부산양서조합사건과 부림사건 등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었고, 1987년 6·10항쟁 때는 거리에서 ‘독재타도’를 외쳤다. 그는 자신이 알게 됐거나 요청해온 시민환경단체에 적게는 수백, 많게는 수천 만원의 기부를 꾸준히 해왔고, 민주화운동에도 물밑에서 큰돈을 댔다. 그러나 결코 표내는 일이 없었다. 건설폐기물 중간처리업체인 서봉리사이클링(주)라는 연 매출 100억 원 규모의 중소기업회장이지만 어느새 지역공동체에서 문 회장은 오블리제 노블리주 정신을 가진 ‘녹색 백만장자’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이날 칠순잔치는 먼저 박정애 시인의 기념축시 ‘백단향나무 목리문을 읽다’가 낭송됐다. 박 시인은 박종철 열사의 고모이기도 하다.
‘어느 별에서 왔을까 눈 속에 더 푸른/ 저 소나무 흙에 발붙이고 씨앗발아부터/ 갑년을 건너 칠순에 닿도록 한결같이/ 구가한 노래는 사람이 사람답기를 (중략) 자가용보다 달리기보다 걷기를 좋아하는 길 위에서/ 문화향유를 벌이보다 쓸 궁리가 더 즐거운/ 도무지 굴복을 모르는 유쾌한 반항아/ 인본주의 동학 인내천사상으로/ 땅을 살리고 강을 살리는 순수무구 고집으로/ 향기로운 꽃인양하면 사람일 수밖에 없는/ 내 말보다 남 말을 잘 들어주고/ 세간사 마파람 높새바람 맞서는 사람/ 내가 기억하는 문 정 현/ 이런 의로운 사람 또 없습니다’.
그리고 이날 축하공연으로 소리꾼인 양일동소리창작소 대표 양일동 선생이 문 회장이 살아온 길을 창작소리로 엮어 냈다. “배우고 익힌 재주 불의행사 아니하고/ 남을 위해 봉사하고/ 이웃 위해 희생허며/ 배고픈 이 밥을 주어/ 기사구제 하옵시고/ 좋은 터에 집을 세워/ 행인구제 하옵나니/ 목마른 땅 물을 주어/ 식수공덕 하옵시고/ 마음 닦고 천심하여/ 어진 사람 되옵시고/ 착한 사람 불러들여/ 공경하고 접대하며/ 선남선녀 길러내어/ 다복하고 화목하라~”.
필자도 문 회장이 좋아하는 김민기의 노래 ‘강변에서’를 박창희 교수의 기타 반주에 맞춰 한곡 부를 기회를 가졌다. “서산에 붉은 해 걸리고 강변에 앉아서 쉬노라면/ 낯익은 얼굴이 하나둘 집으로 돌아온다…”.
이날 함께 한 이들은 문 회장을 이렇게 생각했다. 100만평공원만들기 운동을 해온 김승환 동아대 명예교수는 문 회장을 ‘유쾌한 녹색 백만장자’라 불렀다. 김 교수는 토마스 스탠리가 쓴 『이웃집 백만장자』에서 진정한 백만장자란 자신의 재산에 비해 훨씬 검소하게 생활하고, 자녀에게 부모가 부유하다는 것을 말하지 않고, 절제와 근검절약을 가르치고, 돈보다 귀한 것이 많다는 것을 알려준다고 했다. 그는 “녹색 백만장자는 마음이 부자이고 건강하며 생태적인 삶을 영위하고, 나아가 지구 살리기에 이바지하고 환경·문화활동에 지속적으로 투자하는 사람”이라면서 “문화를 사랑하고, 환경을 생각하고, 나눔의 가치를 실현하고 있는 유쾌한 사람, 문정현 선생이 바로 이 시대의 진정한 녹색 백만장자가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구자상 (사)부산생명의숲 대표는 “문정현 회장은 주류의 거짓들과 그들의 갖은 음모와 술수들에 몸덩어리로 대면해 온, 날것으로 부대껴 온 생면한 인간이었다”며 “인간 문정현의 살아있는 힘은 잃어버린 공동체를 그리워하고 세상의 평화가 재림하기를 바라는 원초적인 바람, 몸의 바람에 있다고 생각한다”며 그의 건강을 빌었다.
김해몽 부산사회적경제지원센터장은 “문 선배는 매사에 우리가 비빌 언덕이었다. 솔직히 말해 언제나 우리 물주였다”며 “언제나 청년 그리고 외로운 상상가로 살아가는 그 모습 오랫동안 보고 싶다”고 말을 했다.
필자도 문 회장을 알게 된 지 30년 가까이 된다. 문 회장은 새로운 걸 많이 연구하는 기업가였다. 그 중 하나가 ‘아트팩토리 인 다대포’였다. 자신의 사업장에 지역 미술인을 상주하게 하고 작품을 제작 전시하는 공간을 조성해 지역 예술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기도 했다.
그리고 문 회장의 기업가정신을 가장 느낄 수 있었던 것이 박근혜 정부때 추진했던 ‘뉴스테이사업’이다. 2016년 2천여 세대의 임대아파트를 조성하는 이 사업을 부산시에 신청하기 위해 여러 전문가들의 자문을 구했는데 필자도 참여했다. 기존의 아파트단지와 달리 생태아파트공동체를 만들고 싶다고 해서 문 회장을 비롯해 전문가 몇 사람이 일본 스마트시티를 둘러보고 해당지역에 환경, 에너지, 복지건강, 문화, 어메니티 등을 적용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시 담당공무원의 마인드가 문제였다. 아파트를 짓는데 문화를 넣겠다는 발상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다. 쓰레기 배출 제로부터 마을공동체, 밥상공동체, 육아공동, 마을공유경제, 문화플랫폼 등을 생각했는데 그런 것이 성공했더라면 지금은 부산의 명물 주거단지가 됐을 지도 모른다.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해온 문 회장에 대해 박근혜 정부 때라서인지 부산시 고위 공무원들이 그리 탐탐해 하지 않았던 것 같고, 그 뒤 오거돈 부산 시정이 출범했지만 이 사업이 전 정부의 사업이라고 해서 결국 채택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때 정말 정치권이나 시장이 당신의 말을 제대로 한번 경청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답답한 마음을 호소하던 문 회장의 모습이 지금도 떠오른다.
이날 김상화 낙동강공동체 대표는 “오늘 문 회장의 칠순모임은 지역공동체가 사람을 챙기고 사람다움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이번 행사는 기록되고 기억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문정현 회장은 이날 인사말에서 “오늘은 너무 쑥스럽고 무안한 날이다. 되돌아보니 칠십 평생이 한 줌밖에 안 됐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 요산 선생이 말한 ‘사람답게 살아가라!’는 문구다. 남은 삶도 그렇게 살고 싶다. 오늘 귀한 자리 만들어주셔서 정말 고맙다.”고 수줍게 말했다.
사람은 예로부터 일흔을 살기 쉽지 않다고 하는 고희(古稀). 그러나 이날 ‘녹색 백만장자’의 칠순잔치를 통해 이렇게 문 회장처럼 ‘멋있게’ 일흔 나이 살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이런 분이 우리사회에, 내 주위에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고 고맙기도 하다. 문 회장님이 더욱 건강하시길 빈다.
<경성대 환경공학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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