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청년기, 사회의식에 눈 뜨다
#가톨릭농민회 활동과 결혼
군대 제대한 뒤 정현에게 두 가지 과제가 눈앞에 놓였다. 먹고 살 일과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 중학 졸업 뒤 농사 지은 경험을 살려 1977년 한국 가톨릭농민회 부산모임에 참가했다. 한국 가톨릭농민회는 1966년에 창립된 농민운동 단체다. 가톨릭 교리에 따라 농민들이 ‘스스로’ ‘함께’ 농민 자신과 사회를 누룩처럼 변혁시켜감으로써 농민구원, 겨레구원, 인류구원을 지향하는 생활 공동체 운동이다. 정현은 흙의 힘을 믿고 정의 생명·평화·사랑을 실현하자는 메시지에 이끌렸다.
부인 진기순(1956년 생) 여사를 만난 것도 이 즈음이다. 부산양서조합에 가입해 사회의식에 눈을 뜨면서 가톨릭농민회에도 참여했다. 부산양서조합은 1978년에 창립된 책을 매개로 한 협동조합이었다. 책을 읽고 토론·교육을 통해 민주의식을 높이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졌고, 노동·농촌문제 등 사회문제와 관련된 이슈들이 논의됐다. 지식에 목말라하던 부산 시민의 열성적인 참여로 조합원이 한때 572명까지 불어났다.
하지만 1979년 부마항쟁이 일어난 직후 군사정권은 부산양서조합을 항쟁의 배후로 몰아 조합을 강제 해산했다. 부마항쟁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체제에 반대한 민주화 운동으로 부산·마산지역에서 시작된 항쟁이다. 이때 부산양서조합의 조합원 300여 명이 연행돼 조사를 받았다. 조합원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모여 독서를 하고 사회문제에 대한 토론을 이어갔다. 결국 1981년 9~10월 조합원 19명이 반국가단체의 이적 표현물을 학습했다는 이유로 영장도 없이 체포되어 불법 감금과 고문을 받았다. 이것이 대표적인 용공 조작 사건인 ‘부림사건’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변호사 시절 이야기를 다룬 영화 ‘변호인’의 배경이 된 사건이다.
정현은 양서조합 조합원으로서 사회과학 책을 읽고 시국토론에 참여하는 등 사회운동에 동참했다. 부림사건에는 직접 연루되지 않았으나 당국의 요주의 인물 리스트에 그의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 정현이 70~80년대 부산지역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던 김재규·최성묵·송기인·김광일 그리고 서울농대 출신 운동권 인사 등을 만나 교류를 갖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이들 대부분은 부마항쟁기념사업회에 관계하고 있다.
이 시기에 정현은 운동권의 사랑방이라 불리던 부산대 글방(헌책방)을 출입하고 가톨릭농민회 농성사건에도 알게 모르게 힘을 보탰다. 가톨릭농민회 활동을 하면서 서울농대 출신 고정석을 알게 되었고 그를 통해 ‘어느 돌멩이의 외침’을 쓴 작가 유동우를 만났다. 나중에 정현이 금정구 구서동에서 쌀가게를 연 데엔 유동우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피격되고 시국이 어수선했다. 부마항쟁이 터졌다. 이어 전두환 신군부가 들어서고 1980년 5월 광주에서 유혈진압이 이뤄졌다. 소식을 접하고 분노한 정현은 광주항쟁의 내용을 알리는 유인물을 제작해 서면 등지에서 뿌렸다.
가톨릭농민회 활동을 하면서 정현은 중구 보수동 기독교사회관에서 함석헌 선생의 생명평화사상 강의를 들었다.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만든 장기려 박사의 노장사상 연구모임에도 참여했다. 함석헌 선생의 무교회주의와 평화사상은 피끓는 청년기의 정현에게 깊은 감명을 안겨주었다. 정현은 매월 한차례 무박으로 청년들과 함께 함석헌 선생의 강의를 들었으며, 동료들과 함 선생의 서울 집을 방문, 가끔씩 1박을 하고 돌아오기도 했다. 이때 정현은 통일운동가 백기완 선생도 만났다. 또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사상과 철학에 심취해 사회의식을 키워나가면서 이를 현실에 접목하려 애를 썼다. 정현이 오늘날까지 체질화하고 내면화한 사회의식은 이 시기에 발아한 것으로 보인다.
#민주화운동 하며 화염병도 제조
정현과 진기순 여사는 1981년 3월 1일 부산 YWCA 강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공교롭게도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식이 있던 날이었다.
사회운동·민주화운동을 한답시고 거리에 나가 시위를 하고 유인물을 뿌리며 화염병을 던진 기억도 새롭다. 80년 광주항쟁 직후엔 부산 남포동과 서면 등지에서 전두환의 만행을 담은 유인물을 뿌렸다. 사복전경인 백골단이 설치던 시기라 잡히면 곤욕을 치를 때였다. 워낙 살벌한 때여서 유인물 뿌리는 기술이 필요했다. 유인물을 버스 지붕에 올려놓기도 하고 고층 건물의 창틀에 올려놓은 뒤 끈을 도화선처럼 이용해 살포하기도 했다.
부산대 앞의 헌책방인 글방 주변에서 동료들과 화염병도 만들었다.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소줏병에 신나를 붓고 심지를 넣은 화염병을 만들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1987년 6월 항쟁 때는 격렬하게 시위에 참가했다.
결혼 직후 정현은 농사 경험을 살려 농산물 유통사업에 뛰어들었다. 집안 누나에게 1억 원을 빌려 부산 금정구 구서동에 쌀가게를 차렸다. 쌀가게가 돈이 안된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가까운 지인 등에게 퍼준 것이 많아 쌀가게는 적자를 면치 못했고, 결국 2년도 안돼 문을 닫았다.
정현이 차린 중앙동 국밥집은 고양이가 노려보는 곳에 생산가게를 차린 꼴이었다. 오래 갈 수 없는 구조였다. 국밥집에는 민주화 운동 동지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어 시국토론을 하였고 당국은 이곳에 촉수를 곤두세우고 동태를 살폈다. 정현은 수사망을 피해 통영으로 피신해야 했으며, 지인에게 맡기고 간 국밥집도 돌아오니 처분되고 없었다.
다시 집도 절도 없는 알거지 신세가 된 정현 부부는 사하구의 허름한 창고건물을 빌려 거주했다. 끼니조차 해결이 안돼 칼국수로 하루 2끼를 먹어야 했다. 앞도 뒤도 캄캄한 시련의 시절이었다.
#잠깐의 경찰 생활 후 농사 지어
생계를 위해 시작했던 쌀가게와 국밥집을 접고 쉬고 있던 정현은 뜻하지 않게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 1982년 4월 경찰이 된다. 뭐라도 해야 된다는 강박감으로 진기순 여사는 학습지 수금사원으로 일하며 경찰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는데, 그 시점 경찰 모집이 남자들에 국한돼 정현이 ‘내가 해보지’라며 벼락치기로 공부하여 합격이 된 것이다. 어지간히 공부하면 경찰이 되는 시대였다.
경찰교육을 받고 있을 시점,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이 터진다. 1982년 3월 18일 최인순, 김은숙, 문부식, 김현장 등 부산 지역 대학생들이 부산 미문화원에 불을 지른 반미운동의 성격이 강한 방화 사건이다. 주동자들이 취조당하는 과정에서 ‘문정현’이란 이름이 나왔다는 소문이 돌았다. 걸려들면 ‘골로 가는’ 상황. 그 이야기를 들은 정현은 ‘잘못하면 엮일 수 있겠구나’ 생각하고 잔뜩 긴장했다. 하지만 당시 정현은 경찰교육을 받고 있던 터라 알리바이가 성립되었다. 그때 경찰교육을 받지 않았더라면 어떤 이유에서든 끌려가 고초를 겪었을 것이다.
경찰이 된 정현은 부산 북부경찰서에 발령받았다. 첫 근무지는 주례파출소였다. 그뒤 을숙도에 파견되어 대공 보안 업무를 담당했다. 을숙도에서 주민들과 외부인의 동태를 감시하는 특이한 역할을 수행했다. 현장에 거처를 마련하고 자연스럽게 주민들과 어울리며 농사도 지었다. 그 당시 한쪽에서는 낙동강 하굿둑 공사를 위한 준비가 한창이었다.
정현의 경찰관 생활은 3년 6개월만에 끝났다. 경찰은 그의 체질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나이롱 경찰’은 공의(공정과 의리)를 추구하는 정현의 삶의 철학과 맞지 않았다. 다만, 을숙도 근무를 하면서 주민들로부터 농사법을 배운 것은 망외의 소득이었다. 정현은 을숙도의 자투리땅을 개간해 수박과 야채 등 농사를 지었고, 그 경험을 살려 경찰을 그만두자마자 강서구 대저동 등구마을 일대에 2만여 평의 국유지를 개간했다. 개간지는 바닷물이 드나드는 조간대로 거의 버려져 있는 땅이었다.
“고생 말도 못하지. 먹고 살아야 했으니까 목숨 걸고 일했지. 비오는 날은 제방둑이 무너질까 노심초사했지. 개간지가 2만 평 정도로 넓으니 인위적으로 쌓은 제방이 얼마나 길겠어요? 비가 오면 배수구를 열어줘야 하는데, 조간대라 밀물이 들이치면 열기가 결코 쉽지 않아요. 새벽에 나가 혼자서 높이 2m 되는 배수구를 연다고 사투를 벌이다시피 작업을 했지. 배수구가 6군데인데 그걸 어떻게 혼자서 해냈는지….”
그 개간지에서 정현은 5천 평 가량의 비닐하우스를 설치해 토마토와 딸기, 양상추, 시금치 등을 재배했다. 하우스에 필요한 나무 지지대를 구입하고, 구포의 종묘상에서 시금치 씨 500만 원어치를 외상으로 사서 심었는데 가을에 홍수가 나서 쫄딱 망한 적도 있었다. 농사 실패는 병가지상사와도 같았다. 그나마 김해 대동에 사는 친구와 함께 재배한 딸기 농사는 그런대로 재미를 봤다. 하우스 농사가 잘 되자 인근 유치원에서 현장학습을 오기도 했다. 사람이 모여들자 정현은 하우스 옆에 백숙집을 차려 장사를 시작했다. 그것도 잠시. 누군가가 이를 당국에 고발해 언론에서 취재를 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등구마을 개간지에서 벌어진 몇 년간의 농사는 많은 에피소드를 남기고 결국 실패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그 실패는 땅과 농업을 제대로 이해하는 값진 경험이 되었다. (계속)
<경성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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