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서봉리사이클링의 출범과 시련
#건설폐기물을 논에 묻다니
농사 실패로 고민에 빠져 있던 1986년 어느 날 정현에게 한가지 제안이 들어온다. 정현의 작은 아버지가 정현에게 골재사업을 해보라고 권유한 것. 작은 아버지 덕에 골재사업에 뛰어든 정현은 자금 여력이 생기자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찾았다. 그가 주목한 것은 바로 건설폐기물이었다. 골재사업을 하면서도 정현은 건설 철거현장의 폐기물이 어떻게 처리되고 관리되는지를 유심히 살폈다.
“철거된 건설폐기물이 어디로 가나 하고 덤프트럭을 따라가 봤더니 대부분 논에 파묻거나 강변의 적치장 등에 매립되고 있었지요. 강서구 명지쪽의 논에 그런 무단매립이 성행했어요. 당시에도 건설폐기물법이 있었으나 현실이 못따라가는 상황이었어요. 폐기물을 논에 파묻는 걸 보면서 ‘저건 아닌데’하고 생각했고, 건설폐기물 처리업에 눈을 뜨게 된 거예요.”
건설폐기물은 건축물의 신축과 해체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토사, 폐 벽돌, 폐 콘크리트, 폐 목재, 폐 합성수지, 철근 등의 폐기물을 말한다. 이러한 폐기물은 바로바로 처리하지 않으면 위험하기도 하고 환경오염이 되기 때문에 처리에 신경을 써야 한다. 하지만 90년대 초반까지 이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미약했고, 일부 업자는 덤프트럭 차주들과 짜고 야간에 변두리의 농지나 유휴지에 이를 파묻는 경우가 많았다.
정현은 합법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버릴 곳을 찾지 못하고 환경오염을 유발하고 있는 건설폐기물을 재활용할 수만 있다면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는 것이다. 순간 정현의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졌다. 이같은 구상 단계가 서봉리사이클링의 출발이었다. 정현은 “그때는 건설폐기물을 논에 안 파묻고 폐기물로 처리해 재활용한다는 생각뿐이었다”고 했다. 70년대 후반 가톨릭농민회에서 활동하며 땅의 소중함을 알았던 것도 사업을 하는데 보탬이 됐다.
관건은 당국의 허가였다. 국내에서 처음 시도하는 건설폐기물 처리업인지라 공무원들이 호의적일 리 없었다. 허가권을 쥔 부산시 청소과는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며 허가를 회피하거나 늦췄다. 허가를 준비하면서 정현은 1994년 10월 부산 다대포에 서봉리사이클링(주)을 설립했다. 그리고 2년 후인 1996년 마침해 부산시로부터 건설폐기물 중간처리업 허가를 획득했다. 허가 작업에 나선지 5년 만의 결실이었다. 부산 최초 건설폐기물 중간처리업체의 탄생이었다. 정현은 당시를 회상하며 “고난의 역사가 시작된 거지”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서봉, 3년만에 기반 잡아
‘서봉(瑞封)’은 ‘상서로움을 봉하다’는 뜻이다. 정현은 지금도 회사 이름은 잘 지었다고 생각한다. 상서로움은 살면서 만나는 좋은 징조다. 그건 길조나 경사스러움이요, 즐거움이다. 재물이라고 보면 돈이 될 수도 있다. 다만, 잘 써야 하는 돈이다.
‘서봉’은 김승동 전 부산대 철학과 교수가 지어주었다. 김승동 교수는 ‘도교사상사건’ ‘불교인도사상사전’ 등을 펴낸 동양철학 전문가다.
회사 설립 후 3년쯤 지나자 일감이 안정적으로 들어왔고 수익이 늘었다. 그 시점 건물폐기물 무단처리가 사회문제화되면서 수요가 몰린 것도 호황을 맞은 배경이다. 무엇보다 건설폐기물 중간처리업은 원가 개념이 적용되지 않아 재처리하는 족족 수익으로 연결되었다. 내다버리는 폐기물을 가져와 재생하니 산업적으로, 환경적으로 도움이 되었다. 초창기 몇 년간 정현은 노다지를 캐는 공장을 가진 기분이었다.
자연 정현의 씀씀이가 커졌다. 도움을 요청하는 손들도 많아졌다. 정현이 다대포에서 폐기물 노다지를 캔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문정현이 돈은 먼저 보는 사람이 임자!’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돌았다. 이러한 호황은 IMF 국제구제금융 사태가 일어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차입경영을 하지 않았기에 IMF 사태가 닥쳤을 때도 서봉은 큰 문제가 없었다.
90년대 중후반 서봉이 잘 나가던 때, 전체 직원이 100명을 훌쩍 넘었다(현재는 30여 명). 여기 저기서 취직을 시켜달라, 일거리를 달라는 요청이 쇄도했다. 남의 요청을 쉽게 뿌리치지 못한 정현은 웬만하면 요청을 들어주었다. 이때 사회운동을 했거나 과거 민주화운동을 하며 어렵게 살아온 동지들이 서봉에 들어가 함께 일했다.
#서봉의 기장 이전과 난관
건설폐기물 처리업체인 서봉의 다대포 공장은 사실 주민 혐오의 대상이었다. 다대포 아미산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뒤부터 줄곧 분진과 소음을 호소하는 민원이 제기됐다. 정현은 언젠가는 공장을 옮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전 시간이 앞당겨졌다.
우여곡절 끝에 정현이 새로 정한 공장 자리는 기장군 철마면 고촌리 사등골 산400-3번지 일원. 실로암공원묘지 인근으로 거주민이 거의 없고 공장 부지가 약 2만 평 정도로 넓어 확장성이 있었다. 다대포 공장을 ‘아트팩토리’로 개조해 예술가들에게 내준 정현은 문화지원의 보람을 느끼면서 조용히 공장 이전을 추진했고, 2012년 마침내 기장 고촌 공장을 완공해 재가동을 서두른다. 그러나 기장군이 제동을 걸었다. 전임 군수가 허가해 준 사업임에도 후임 군수는 지역민의 뜻을 존중한다며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반송지역 일부 주민들은 서봉이 이전한다는 소식을 듣고 ‘고촌 건설폐기물 처리시설 설치 결사반대’를 외쳤다. 주민들은 “건설폐기물을 부수고 재처리하다 보면 석면 먼지와 비산먼지, 지하수 오염과 반송천 오염이 우려된다”며 공장 가동을 반대했다. 하지만 서봉은 “다대포에서 20여년 운영 노하우를 축적한 환경친화 기업임"을 강조하며 군청과 주민들을 설득했다. 군청은 주민편이었다.
서봉은 기장군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진행했다. 다대포에서 공장을 옮겨온 상태에서 고촌 공장이 돌아가지 않으면 회사는 파산을 맞을 수도 있는 국면. 소송전은 3년 가까이 진행됐고 그 기간동안 서봉은 매출 제로 상태였다. 고촌 공장을 지으며 일으킨 은행 대출이 이자 폭탄으로 돌아왔고, 직원들의 월급은 꼬박꼬박 지급해야 하는 경영위기가 계속되었다. 다음은 정현의 말이다.
“매월 은행이자 등 금융비용이 1억~2억 원가량 나가는 상황이었죠. 그때 어떻게 버텼는지 모르지. 집사람의 속도 까맣게 탔을 거야. 어중개비 사업가 남편 만나 그동안 숱한 고생을 했는데 진짜 난관을 만난 거예요. 앞이 안보였지. 눈뜨면 오늘은 어떻게 보내지? 하는 생각뿐이었으니까. 그렇게 3년을 견뎠지. 내 성격이 낙천적이지 않았으면 아마 못버텼을 거야.”
낙천적! 정현의 말마따나 그런 최악의 경영위기 상황을 견딜 수 있는 힘은 긍정적 성격과 그걸 받아들이는 긍정의 힘에 있지 않았을까.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정현은 사무실에 출근하면 ‘허허~’ 웃었다고 한다. 좋아서 웃었을까. 견디기 어려운 현실, 어이없는 현실을 낙관적 웃음으로 털어버렸다고 보는 편이 온당할 것이다.
정현의 낙관적 기질과 어중개비적 성질에 대해선 부인 진기순 여사도 인정하고 있었다. 부인의 말이다.
“기장 고촌으로 공장을 옮기고 발이 묶였을 때가 아마 최고의 위기가 아닌가 해요. 정말 하루하루 버티는 게 악몽이었으니까요. 그런 극한의 난관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았어요. ‘될 거다, 풀릴 거다’ 하고 믿는 거예요. 포기를 모르고 끝까지 가는 성격이 장점이라면 큰 장점이죠. 목표를 정하면 죽을동 살동 밀고 나가는 성질도 있어요. 그리고 설득을 잘 하는 편이에요.”
큰 고비를 넘긴 지금의 서봉은 정상궤도에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겉으로는 무리가 없어 보이지만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아마 기업경영은 경영자가 손을 놓지 않는 한 끝없는 호황과 불황, 평온과 위기 상황이 반복된다. 정현이 서봉을 설립하며 “고난의 행진 시작“이라고 말한 이유다.(계속)
<경성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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