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문화 애호와 사회공헌 활동
서봉리사이클링의 연간 매출은 100억~120억 원 정도다. 외형만 보면 그저 그런 중소기업이다. 하지만 기업의 씀씀이나 경영철학 등 됨됨이는 중견 업체 그 이상이다. 기업이윤의 사회환원 차원에서 서봉은 지금까지 모범적이고 실험적인 역할을 보여주고 있다. 아트팩토리 같은 대안공간 지원사업은 사실 대기업이라도 실행하기 어려운 사업이다. 돈만 있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확고한 문화의식과 예술 취향, 아이디어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서봉의 사회공헌 분야는 △환경운동 △문화예술 △민주화운동 △걷기문화운동 △공동체 지원 등 여러 갈래다. 크게 보면 환경과 문화, 공동체 영역이지만, 체계적이란 느낌은 들지 않는다.
1994년 서봉 설립 이후, 정현이 행한 각종 지원 및 후원사업의 총 금액은 얼마나 될까? 이 질문에 대해 정현은 “나도 모른다. 계산을 안 하고 했으니까”라고 답했다. 계산을 안 하고 지원했다는 것은 즉흥적이고 무원칙이란 지적을 받을 수도 있지만, 계산 없이 사심없이 지원했다는 말도 된다. 그 점 때문에 정현은 불필요한 오해를 사거나 괜한 손해를 보기도 했다. 그래도 개의치 않았다. 그게 ‘문정현 식’이기에.
정현이 그동안 행한 각종 지원·후원 사업을 열거해 보니 도합 100억 원은 족히 될 듯했다. 꼭 필요하고 절실하고 요긴한 곳에 이 돈을 썼으니 그만큼 우리 사회는 정의로워지고 밝아졌을 것이다. ‘100억’이란 거액의 의미에 대해 묻자, 정현은 “그런 거 계산하고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 대책없는 기부자의 사회공헌을 간단히 정리해본다.
#환경기술 연구·환경운동 지원
서봉은 건설폐기물을 환경친화적으로 수집 처리하고, 다시 쓸 수 있는 건축자재를 생산해 내는 폐기물 전문처리업체다. 30여 년간 해체·철거 및 건설폐기물의 재활용, 순환골재 생산을 해오면서 차별화된 노하우를 보유했고, 지속적인 기술혁신을 통해 차세대 환경기술개발을 선도해왔다.
1999년 환경시스템연구소를 세웠고, 2001년에는 연구개발투자 벤처기업(부산울산중소기업청) 등록, 오폐수 정화용 담체 의장 등록(특허청), 오수정화장치 특허 등록을 받아냈다. 이어 2004년에는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와 차세대 환경기술개발사업 협약을 체결했고, 2006에는 기업부설연구소 등록을 마쳤다. 또 2007년에는 건설폐기물 이물질 선별장치 특허 등록을 이뤄냈고, 2008년에는 재생골재의 세척 및 이물질 선별장치 특허 등록(특허청)을 받았다. 2010년 들어서는 분체 및 페이스트 복합교반기 특허 등록(특허청), 칼튼식 전기로 등허등록을 이뤄냈고, 2011년에는 건설폐기물 선별방법 미국특허 등록을 마쳤다. 서봉이 기술개발로 이뤄낸 국내외 특허 등록은 모두 10여 건에 이른다. 활발한 기술개발과 기업혁신의 성과라 할 수 있다.
정현은 1999년 낙동강공동체 김상화 대표가 낙동강 살리기 운동을 벌이자 캠페인에 적극 참여했고, 지금까지도 낙동강공동체 운동에 물심양면 힘을 보태고 있다. 낙동강 환경답사에 참여한 횟수도 수차례에 이른다.
2001년에는 온천천 살리기 운동에 뛰어들었다. 도심 생태하천으로 거듭나기 전 온천천은 수질오염과 무분별한 환경쓰레기로 몸살을 앓았다. 시민환경단체들이 온천천 살리기 운동에 나서자 정현도 발벗고 나섰다.
부산환경운동연합의 하천정화 및 환경오염 감시활동에도 재정적·정신적 힘을 보탰다. 특히 2000년대 전후엔 부산환경운동연합의 재정 상당 부분을 충당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0년 부산참여자치시민연대에도 참가해 후원회장을 맡기도 했다. 환경분야의 이같은 활동으로 정현은 2002년, 2006년 두 차례 환경부장관 표창을 받았다.
#요산문학관에 ‘요산뜰’ 기부
요산(樂山) 김정한(1908~1996)은 격동의 20세기를 온몸으로 살았던 작가다. 민족문학을 대표하는 문인이었으며 불의한 현실에 맞섰던 지사였다. 부산 금정구 남산동의 요산문학관은 그러한 요산의 삶과 문학, 정신이 깃든 곳이다. 요산문학관은 200여 평 부지에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로 건립되어 2006년 11월 개관했다. 한데, 원래는 입구가 갑갑했다. 민가가 복잡하게 들어서 개방감이 없고 찾기도 쉽지 않았다. 요산문학관 개관 직후인 2007년, 당시 송기인 요산기념사업회 이사장은 문학관을 찾아온 정현을 보고 한가지 부탁을 했다.
“문 사장, 여기 문학관은 안은 괜찮은데 바깥 입구가 답답해. 문 사장이 입구 주위의 민가 3채 정도를 구입해 기부하게. 좋은 일이 될 걸세. 민가가 확보되면 그곳에서 작가들이 레지던스로 운영할 수도 있겠지. 어떤가? 그리해라 마.”
얼떨결에 부탁을 받고 생각할 틈도 없이 “그렇게 해 보지요 뭐”라고 했던 게 말씨가 되어 정현은 그곳의 민가 3채를 매입해 기부했다. 당시 매입비는 2억 3천만 원.
민가 3채를 매입해 소유권은 확보했는데, 활용방안이 마땅치 않았다. 세금 문제가 복잡했고,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것도 문제였다. 빈집이 방치되자 민원도 생겼다. 고심하던 요산기념사업회는 민가 3채를 철거하기로 하고 다시 정현에게 3천만 원 기부를 요청했다. 애초 민가 3채를 매입해 기부한 터라 후속사업을 외면할 수 없어 철거비 3천만 원을 재차 기부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오늘날 ‘요산뜰’이다.
가끔씩 요산문학관을 찾는다는 정현은 “얼떨결에 떠밀려 기부한 곳에 요산정신의 씨앗이 뿌려지고 문학꽃이 피는 것 같아 기분이 새롭다”고 말했다.
#‘아트팩토리 인 다대포’ 지원
2007년 가을 부산 사하구 다대동에 생소한 대안문화공간 하나가 들어선다. ‘아트팩토리 숨’이란 이름의 예술공장이다. 정현이 지인의 권유에 따라 서봉리사이클링의 공장 건물 중 1,000여 평을 지역작가들을 위해 내놓고 ‘프리하게’ 작품활동을 하도록 한 것이다. 건설폐기물 처리업체와 예술공장. 언뜻 어울리지 않는 조합 같았는데, 해를 거듭하면서 이곳은 부산은 물론 전국에서 주목하는 창조적 대안문화공간으로 발돋움 했다. 정현이 이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단순했다.
“공장 임대 공지 후 2개월의 공백 기간이 있었는데 한 지인이 ‘이곳을 작가동으로 빌려주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지요. 그때는 덤터기 안 쓰려고 ‘이 공간만 주면 되지’라고 단순히 생각하고 작가들에게 공간을 제공했던 게 출발이죠. 말 그대로 ‘벌로’ 시작된 거지.(웃음)”
작가들의 단순 레지던스 공간으로 출발했던 ‘아트팩토리 숨’은 이듬해부터 공간을 대폭 개조하고 운영시스템을 강화해 ‘아트팩토리 인 다대포’란 이름으로 활동폭을 넓힌다. 공모 심사를 통해 입주한 작가가 많을 땐 20명에 달했다. 회화, 조소, 섬유, 금속, 도자, 목공예 등 장르도 다양했다. 정현은 이들에게 기숙사와 공방, 전시와 휴식, 주차 공간 등을 제공했다. 임대료, 전기세, 수도세 등도 지원했다. 약 4년간 지원한 돈이 임대료 포함, 20억 원에 달했다. 독특한 방식의 메세나운동, 즉 기업이윤의 사회환원이다.
작가 공동체의 힘으로 내실있는 성과도 만들었다. 입주 작가들은 2009년 정부 지원을 받아 사하구 감천2동 산복도로 일대에 조형물을 설치하는 ‘꿈을 꾸는 부산의 마추픽추’ 사업을 진행했고, 2010년에는 ‘미로미로(美路迷路) 프로젝트’를 가동해 감천2동 태극도마을의 빈집과 골목길을 문화적으로 재생하는 작업을 펼쳤다. 오늘날 세계적 도시재생 관광지로 주목받는 감천문화마을이 변화의 옷을 갈아입는 순간이었다.
이러한 작업과 활동은 서봉의 뒷받침이 있어 가능했다. 정현은 아트팩토리의 충실한 후원자로서 작가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최대한 지원했다. 가끔씩 기획회의에 참가해 아이디어를 보태거나 에너지를 불어넣기도 했다.
#문화의 힘을 믿다
2008년 아트팩토리가 재개장될 때 송기인 신부가 와서 축사를 했다고 한다. “문정현 회장은 참으로 특이한 사람이다. 사업을 해서 돈 벌 궁리를 하지 않고 이런 엉뚱한 일을 벌인단 말이지….” 참석자들이 쓴웃음을 지었지만, 실은 날카로운 메시지가 실린 축사였다.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누구나 할 수 없는 일을 정현은 하고 있었다.
그렇게 잘 나갔던 부산 최고의 예술공장은 2011년 3월 개장 4년만에 문을 닫고 만다. 서봉의 자금난 때문이었다. 다대포 공장을 기장 고촌으로 옮기는 데 200억 원이 필요했고, 자금 조달을 위해 다대포 공장을 팔아야 하는 상황. 부산시와 사하구가 지원책을 마련했으나 형평성 논란 때문에 그마저 무산된다.
정현은 자주 김구 선생의 ‘문화민족론’을 거론한다. 그리고 문화를 앞세워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려고 한 김구 선생을 누구보다 존경한다.
“김구 선생이 젊은 날에 부국강병론을 이야기했지만 상해에 가서 보니 부국강병이 얼마나 절망스러운 것인가를 느꼈다고 하지요. 그 절망에서 그를 일으킨 것이 문화였어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 사람이 갖춰야할 품성을 만들고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문화가 필요하지요.”
이를테면 문화행복론이다.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경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문화라는 것이다. 경제가 소유와 이기적 삶을 부추긴다면, 문화는 이타적 삶, 공동체의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믿음이다. (계속)
<경성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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