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부자 되세요"

정찬무 승인 2018.07.09 15:02 | 최종 수정 2018.07.09 15:53 의견 0

"도련님, 마음의 부자가 되세요."

나를 13살 때 거둬서 대학졸업 때까지 키워주신 큰형수님이 중ㆍ고교 시절 내게 자주 하신 말이다. 그 때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제대로 몰랐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꿈꾸며 산다. 그러나 주변을 돌아보면 너무 물질적인 것에서, 그리고 너무 거창하게 그 행복을 구하려고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부터 24년 전인 1994년, 그 당시 재직 중이던 회사에서 투자했던 아프리카 모잠비크 현지 공장(농장)책임자로 약 1년간 근무를 다녀온 적이 있다. 모잠비크는 1,000여 년에 걸친 아랍과 포르투칼에 의한 억압과 착취를 당하고 식민지에서 해방되던 1975년부터 17년간 정부세력인 해방전선(FRELIMO)과 우파성향의 반정부 세력 민족저항운동(MNR) 간의 내전을 겪었다.

24년전인 1994년 모잠비크 근무당시 수도인 마푸토에서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사업을 운영하던 지인과 근무지 인근의이남바느해변을 걷는 모습
1994년 모잠비크 근무 당시 수도인 마푸토에서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사업을 운영하던 지인과 근무지 인근 이남바느 해변을 산책하는 필자(오른쪽).

내전의 결과는 엄청난 사회적 비용과 민간인 희생자의 사망이었다. 수십만의 모잠비크 사람들이 사망했고 500만 명이 국내실향민으로 전락하였으며 1만여 명이 이웃국가로 넘어가 난민신세가 되었다. 도로, 병원, 학교, 농장, 마을 등은 내전의 와중에 대부분 파괴 되었다. 지금도 예맨을 비롯한 여러 국가에서 내전을 치르고 있지만, 모잠비크 내전은 냉전시대의 대표적인 이데올로기 전쟁으로 기록되고 있다.

내가 근무했던 곳은 5만 평이 넘는 땅콩과 비슷한 '캐슈넛, Cashew Nut'나무농장 이었다. 원래 캐슈나무는 브라질 해안지방이 원산지였으나, 포르투칼 식민주의자들에 의해 아프리카와 아시아 오스트레일리아로 전해 졌다.

내전이 종식되고 2년 후 내 눈에 들어 온 모잠비크는 너무도 처참했다. 도로는 복구가 안 되어 중간 중간 포탄의 흔적으로 크고 작은 구덩이가 파여 있어 속도를 낼 수도 없었으며, 농가를 비롯한 대부분의 건축물들은 포탄 등으로 파괴된 후 다시 지어진 듯 했고, 내전을 치르기 전 여러 군데 산재해 있던 공장도 대부분 파괴되었다.

그리고 내전이 끝난 지 2년이 채 안되다 보니 총기류 수거가 제대로 안되어 대부분의 집마다 총과 실탄을 가지고 있었고, 또 직원들 중에 마약이나 코카인을 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어 나도 만약을 대비하여 사무실 책상밑에 항상 실탄을 장전한 총을 두고 근무했을 정도로 나라 전체가 조금은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첫 번째로 한 일이 몇십 킬로미터를 걸어서 출ㆍ퇴근해야 하는 현지인들을 위해 공장 옆 나대지에 70여 채의 기숙사(움막집)를 직원들과 함께 짓는 일이었고, 나도 그 중 한 곳에서 기거했다.

주말에는 내전 때 파괴되었으나 임시로 복구한 학교에서 남아공으로 유학을 다녀온 공장직원의 통역도움을 받아 서툰 스페인어와 포르투칼어를 섞어가며 우리로 치면 국민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를 한 군데 모아 놓고 포르투칼어 영어 산수 세계사 등을 가르쳤다.

캐슈나무 열매는 수확기가 되면 저절로 바닥에 떨어지는데 공장내 시설에서 가공하여 창고에 보관했다가 컨테이너에 실어 수도인 마푸토항을 통해 싱가폴 등 여러나라로 수출하였다.

현지인들의 주식은 코코넛을 말려서 긁어낸 녹말가루를 현지 푸성귀와 섞어서 볶아 먹는 것이었으나, 그것도 귀해서 먹지 못하고 굶는 사람들이 많았다. 내가 있던 곳은 코코넛 외에는 과일나무가 별로 없었다.

내가 근무했던 곳은 행정단위로 보면 군 소재지였으나 하나 있던 병원은 내전 때 파괴되어 흔적만 있었고, 40여 Km떨어진 해안도시인 이남바느(도청소재지, 마다카스카르 섬 인근)란 곳에 병원이 하나 있었다.

☞나이지리아의 공영방송 TVC News의 모잠비크 내전 방송(유튜브 캡처)

사망률이 제일 높았던 것은 굶주림 보다는 오히려 말라리아였다. 유일하게 나만 차를 가지고 있다 보니, 자기애들이 급성 말라리아에라도 걸리면 공장직원 여부를 떠나 모두 내게로 데리고 와서 병원에 데려가 달라고 하소연을 했다, 병원이 불과 40여 Km거리에 있었지만 포탄 맞은 곳이 너무 많아 속도를 못내어 병원까지 운전해서 가는 시간이 내게는 너무도 안타깝고 길게만 느껴졌다.

어른들은 사망률이 비교적 낮았지만, 어린애들은 제대로 먹지 못해 기력까지 약해서 병을 이겨낼 힘이 없었다. 병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내 옆자리에서 많은 아이들이 급성 말라리아로 죽어갔다.

그들에게도 죽은 자식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정도로 너무도 귀하고 사랑스런 존재였을 것이다. 지켜보는 나도 이 나라의 안타까운 현실에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다는 자괴감과 자식 잃은 부모의 슬픔이 가슴으로 전해져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감출 수 없는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도 결국엔 급성말라리아에 걸려 사경을 헤매다 수도인 마푸토 큰 병원에서 임시치료 후 급거 귀국하여 한국의 병원에서 2달간 완치 후 복직할 수 있었다.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에서 김포공항까지 17시간을 비행기로 오면서 내내 나의 의식을 지배했던 것은, 현지에서 매일매일 처절하게 느끼고 지냈지만 그동안 내가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 줄을 모르고 살았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는 몸이 허락하는 한 막노동을 해서라도 굶어 죽지는 않는다. 하지만 섭씨 44도가 넘는 모잠비크는 고용시설도 없을 뿐더러 낮에는 더위 때문에 일을 할 수도 없고, 어떻게 보면 심리학자 매슬로우의 인간의 욕구5단계설 중 1단계인 이른바 생존욕구를 해결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았다.

지금 이 시간에도 아프리카를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는 기아로 또는 말라리아와 같은 여러 질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도 극빈층이 일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웬만하면 하루세끼 밥은 챙겨먹고,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으면 된다.

내가 1년간 겪으면서 지켜본 모잠비크와 비교하면 얼마나 행복한 나라인가?

인간은 환경의 동물이다. 본인이 겪어보지 않으면 누가 뭐라고 장황한 경험담을 얘기해도 제대로 실감하지 못한다. 아마 내가 겪은 모잠비크 얘기도 마찬가지 일 수도 있으리라. 그래서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들이 내 글에 공감해 주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그 당시 모잠비크의 실상이었다, 그 나라 사람들도 우리네와 꼭 같은 고귀하고 소중한 생명체이다. 다만 태어난 곳이 우리와 다르다는 이유로 너무도 처참한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개인적으로 '금수저'니 '흙수저'니 하는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내 얘기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로 있겠지만 흔히 말하는 '흙수저'도 열심히 살고 마음먹기 따라서는 얼마든지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자신을 꼭 남들과 비교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나도 ‘금수저’는 아니다.

여기서 글의 서두에서 제시한 행복의 기준은 과연 무엇인지 한 번 살펴보았으면 한다. 오래 전 금욕주의자들이 주장했듯이 '마음이 평온한 상태'가 사람들이 찾으려고 하는 행복의 토대가 아닌가 생각된다.

마음이 평온하려면 첫째, 위에서 지적했듯이 남들과 자신을 비교하지 말고 자신만의 색깔로 세상을 사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본다.

꽃들은 다른 꽃들을 시샘하거나 부러워하지 않고 자신만의 색깔을 한 껏 뽐내다 때가되면 알아서 떨어진다. 그 뿐이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사람도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며 살아야지 거스르면 탈이 생기게 된다. 둘째는 자신이 처한 상황(환경)과 본모습(실체)을 그대로 인정하며 받아 들이라는 것이다. 내 개인적인 견해를 전제로 위 두가지 조건만 선행된다면 마음의 평온은 어느 정도 찾을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토대로 열정적으로 엄숙한 삶을 살아내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이 학생들에게 외쳤던 'carpe diem'이란 말처럼 순간을 즐기면서 최선을 다해 살면 되는 게 아닐까? 안 좋았던 과거는 죽은 것이니 돌아보며 후회할 필요도 없는 것이며,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해서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할 필요 없이 오롯이 지금 이 순간 내가 하고 있는 것에 열과 성을 다하고, 그래서 그런 삶이 하나 하나 쌓여가면 결국 행복한 성공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피력해 본다.

물론 이 얘기가 경제적인 문제 등으로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겐 공허한 얘기로 들릴 줄을 알기에 억지로 동의를 구하지는 않겠다. 그리고 내가 60가까운 세월을 살아오면서 경험으로 체득한 개인적인 소견임을 분명히 밝혀둔다.

그리고 삶의 목표를 부(富)나 명예 권력 출세 등에 두지 말고 행복에 두고 살라고 권하고 싶다. 그러나 행복해지기 위해서 위의 4가지를 포기하라는 논리는 절대 아니다. 문제는 선ㆍ후가 무엇인지는 분명히 구별하면서 살자는 얘기다. 행복이 최우선이어야 한다.

김소운의 수필 <가난한 날의 행복>을 보면 '왕후의 밥, 걸인의 찬'이란 말이 나온다. 작가의 의도와는 조금 벗어나는 소견이지만 비록 풍족한 찬은 아니더라도 하루하루 밥 세끼 챙겨먹고 평범하게 사는 것을 지금 이 순간에도 너무도 감사해하며 산다.

중국 원나라 시절 증선지는 중국 고대사부터 송나라 멸망을 다룬 십팔사략(十八史略)에서 함포고복(含哺鼓腹,음식(飮食)을 먹으며 배를 두드린다 라는 뜻)이란 말로, 천하(天下)가 태평(太平)함을 빗대어 표현하기도 했다.

물론 시대 상황이 현재와 완전히 다르지만 물질만능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이 조금은 각성해 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요즘 세태가 돈이면 다된다는 식의 배금주의(拜金主義)가 팽배해 있고, 잘 나가는 친구나 이웃 등을 자신과 비교하여 심하면 자괴감과 우울증 등으로 자살까지 이어지는 것을 보며 때로는 역설적이게도 자신보다 아래를 보며 살 필요도 있다고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물질적으로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며 가족끼리 넉넉한 마음으로 오손도순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삶인지를 느끼는데 나의 모잠비크 경험담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40여년 전 나의 큰형수님이 내개 말씀하신 '마음의 부자'의 진정한 뜻이 이젠 무슨 의미인지 확연히 이해가 되고, 또 실천하며 살고 싶다.

더불어 큰형님과의 신혼시절부터 13세살 어린 나를 거두어서 대학까지 키워내시고 지금은 칠순을 넘긴, 나에게는 어머님과 같은 존재로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있을 큰 형수님께 앞으로 살아가면서 그 크신 은혜에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삶을 살고 싶다.

<프로매치코리아 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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