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육지라면

정찬무 승인 2018.07.15 19:58 | 최종 수정 2018.07.15 21:23 의견 0

 

3주 전 시골 어머니께 다녀왔다. 7년 전부터 치매를 앓고 계시는 어머니는 1년 전보다 많이 약해 보이고 기억력도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 내가 막내아들이라는 것을 잘 기억하지 못했다. 나는 7살 때까지 모유를 먹었다. 젖을 못 먹게 하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써 보았지만 워낙 극성스러워서 당해내지 못했다고 한다.

지금 껏 제대로 사는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해 늘 부모님 마음고생만 시켜드렸는데, 정신 차리고 제대로 살려하니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없고 어머니마저 치매에 걸려서 안타까운 마음 뿐이다. 올해 92세. 사실 날이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그동안 변변한 효도 한 번 못해드려 어머니 생각날 때마다 가슴 한켠이 늘 아프게 시려온다.

1.사진1: 1990년 신혼시절 함께 모시고간 서울 목동 빠리공원에서 야외식사 중인 부모님 (가운데는 필자의 부인)
1990년 신혼시절 함께 모시고간 서울 목동 빠리공원에서 야외식사 중인 부모님 (가운데는 필자의 아내)

몇 해 전까지 어머니가 즐겨 부르던 노래는 가수 조미미가 부른 ‘바다가 육지라면’이었다.

어머니가 그 노래를 부르면 아버지를 비롯한 온 가족이 즐거이 박수치고 웃으며 같이 따라 부르곤 했다. 그리고 불과 몇 해 전 까지도 경로당에서 동네 친구들이 노래 한 곡 하라고 권하기라도 하면 꼭 그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어머니가 그 노래를 왜 그렇게 좋아하게 되었는 지에 대해서는 나는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 6년 전 조미미 씨가 사망하면서 그 노래 가사와 어머니의 살아온 날들을 곰곰히 유추해 본 후에야 어머니가 그 노래를 자주 불렀던 이유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옛 사람들은 자식의 부모에 대한 효도를 닭과 까마귀에 빗대어 표현했다.

조선 정조 때의 문신으로 좌부승지를 지낸 김약련의 '두암집'에 사람닭 이야기('인계설人雞說')가 나온다. 김약련이 이웃집 닭들을 유심히 관찰해 보니 어미닭이 자신의 어미닭(할머니닭) 모이를 빼앗아 새끼닭에게 먹이는 것을 본 것이다. 그리고 인간세상과 견주어 세상을 한탄한다.

“어미닭이 병아리를 키울 때 그 병아리가 자라 어미닭이 할머니닭에게 한 것처럼 꼭 같이 따라할 것이라고 생각이나 했겠는가? 사람도 이와 무엇이 다른가. 열이면 열 부모를 제대로 모시지 못한다. 이와 달리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백에 1명 정도다. 또 자식이 자신을 잘 모시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은 일천 명 중에 한 명에 불과하다.“ 닭과 같은 사람을 ‘사람닭’이라는 표현으로 그 당시 세태를 꼬집은 것이다.

요즘은 사회적으로도 효문화가 강조되고 주변에 극진히 부모를 공양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여전히 김약련이 지적한 ‘내리사랑’은 어쩔 수 없는 듯하다.

자식만 아는 닭과는 다르게 까마귀는 효를 상징하는 새로 알려져 있다. 까마귀는 새끼들이 60일 정도 자라면 오히려 그 새끼가 어미 까마귀가 죽을 때까지 먹여 살린다. 자식만 아는 닭과는 달리 부모로부터 받은 은혜를 다시 갚는 것이다. 이를 두고 중국 명나라 때 이시진은 <본초강목>에서 까마귀가 어미의 습성을 반포한다 해서 ‘반포조,反哺鳥’라고 표현했다. 또 진나라 때는 까마귀의 효를 빗대어 ‘반포지효,反哺之孝’란 말로 당시 사람들에게 효를 권장하기도 했다.

나는 그동안 까마귀 보다는 닭쪽에 훨씬 더 가까운 삶을 살아오지 않았나 반성해 본다.

별처럼 하늘에서 / 빛으로 쏟아지고

물레야 날이 새도 / 어쩌면 그리 도는가

십년이 다섯 돌아와 / 님의 사랑 깨치나

학자 전성배의 <어버이 은혜>란 현대시조다.

은혜 혜(惠)자는 물레 전(叀)과 마음 심(心)으로 이루어져 있다. 물레는 한 쪽 방향으로만 돈다 어버이 마음(心)도 이와 같아서 오로지 내려주기만 할 뿐이다. ‘내리 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말을 한 글자로 표현하고 있다.

2.사진2: 김홍도의 물레질을 하는 여성(왼쪽)_출처:위키백과
김홍도의 물레질을 하는 여성. 출처 : 위키백과

오래 전 돌아가신 부친과 어머니는 같은 동네 소학교 동창 이었다. 어머니는 비교적 유복한 환경과 당시 한학을 하시던 외조부의 장녀로 태어났다. 17살에 시집오기 전까지 힘든 일을 전혀 해보지 않았다. 그러나 시댁은 1년에 제사를 10번 이나 지내는 종갓집 이었고 머슴을 2명 둘 정도로 농삿 일도 많아서 처음에는 시어머니 밑에서 여러 가지 집안 살림을 배우느라 고생이 많았다. 그리고 밤에는 피곤한 몸으로 할머니와 새벽녁까지 물레를 돌려서 실을 뽑아 목돈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어릴 때 기억나는 어머니의 모습은 늘 여유가 있고 또 힘든 일이 있어도 밝게 웃는 인자한 모습이었다.

할머니가 워낙 검소하고 부지런한 분이어서 며느리 노릇 하기가 많이 힘들었을 텐데도 천성이 너그러워서인지 시어머니와 별 다투는 일 없이 사이 좋게 잘 지냈다.

할머니가 아버님을 낳은 지 2년도 안 되어 할아버지는 40세에 요절 하셨다. 할아버지의 본부인이 사별하자 재취로 처녀 시집을 온 할머니는 남편과 결혼한 지 3년만에 사별하고 만것이다. 26살 나이에 청상과부가 된 할머니는 재혼을 안 하고 한 명 있는 아들을 애지중지 키우며 사는 보람을 느꼈다. 그래서인지 할머니는 아들과 며느리가 자식을 많이 낳아 주기를 은근히 원하셨다.

그래서 나의 형제는 4남3녀로 7남매이다. 원래 큰 형 밑에 “순이”란 이름을 가진 큰 누나가 있었다고 한다. 6.25때 홍역이 걸렸는데 그 때가 전쟁중이어서 약사나 의원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피난을 떠나고 없어 제대로 손도 못써보고 저세상으로 떠나 보냈다고 한다. 어릴 때 가끔 부모님이 당신들보다 먼저 떠나보낸 큰 딸 얘기를 하며 눈물 짓던 모습이 떠오른다.

3년 전 어머님을 뵈러 갔을 때 일이다. 길게 자란 어머니 발톱을 깎아드렸다. 발톰 무좀이 심해서인지 발톱 밑이 두껍고 하얗게 썩어있어 손톱깎이로는 도저히 긁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커터칼로 조심스럽게 긁어내는데 어머니가 아프다며 안깎겠다고 엄살을 부렸다. 한쪽 발을 모두 깎아드리고 어머니가 힘들어 하셔서 다른 쪽 발을 내 무릎위에 올려 놓았다. 그 때 발톱을 깍으려다 무심결에 쳐다본 어머니의 발목 두께가 내 손목 두께와 비슷했다. 갑자기 왈칵 눈물이 났다. 평생을 고생만 하며 살아온 삶의 흔적이 앙상한 무릎에 그대로 녹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눈물 방울이 어머니 발등위로 떨어지자 치매에 걸린 어머니는“야야 와 땀을 흘리노?”하신다. 그 말을 듣자 갑자기 눈물을 주체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엄마, 좋아하는 노래나 한곡 해보세요”했다. 내 눈을 껌벅껌벅 쳐다보던 어머니가 조용한 목소리로 “얼마나 멀고 먼지 그리운 서울은...”이라고 시작되는 조미미의 ‘바다가 육지라면’을 부르기 시작한다.

아버지는 장남인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후 삼촌들과의 재산 상속 문제와 뜻대로 풀리지 않은 당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주로 술로 그 설움을 달래신 분이다.

그러다 보니 평생을 아버지 곁을 지킨 어머니는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살면서 남편 수발하느라 여러 가지로 마음고생이 많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버지로 인해 속상한 일이 있어도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친정엘 가지 않았다. 본인이 그런 일로 친정에 가면 친정부모가 마음아파 할까 봐 본채 뒤 감나무 밑에 쪼그리고 앉아 그 힘든 세월을 가슴으로 삭이며 소리 없는 눈물로 달랬다.

그런 일들이 쌓이고 부터 어머니는 우연히 들은 조미미의 ‘바다가 육지라면’을 좋아 하시게 된게 아닌가 싶다.

아버지의 자식에 대한 교육열은 당시 시대상황을 견주어볼 때 각별해서 큰형이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외지로 전학을 시켰다. 그리고 큰형이 서울소재 대학에 진학하면서 어머니는 일찍이 장남과 떨어져 지냈다.

4.사진4: 24년 전인 1994년 큰 형이 외무공무원으로 근무하던 괌 공관 인근 공원에서의 부 모님.
1994년 큰형이 외무공무원으로 근무하던 괌 공관 인근 공원에서의 필자 부모님.

어머니와 살갑게 지내던 할머니도 큰형이 서울로 올라가자 시골 살림을 며느리에게 맡기고 장손 뒷바라지를 위해 서울로 갔다. 게다가 막내형과 나마저 공부를 위해 초등학교 때 서울로 전학을 가면서 어머니 곁을 떠나야 했다. 아들 셋을 천리 객지에 둔 어머니는 자식들을 돌봐주지 못해 안타깝기도 하고 너무도 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로 인해 속이 상할 때 그 때마다 위로가 되었던 시어머니 생각도 간절했을 것이다. 서울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당신의 처지가 특히 아버지가 속이라도 상하게 할 때는 누구한테 하소연할 데도 없어 많이도 서글펐을 것이다. 그래서 노래 ‘바다가 육지라면’의 ‘얼마나 멀고 먼지 그리운 서울은, 파도가 길을 막아 가고파도 못갑니다’라는 가사가 자신의 심정을 대변하듯 구구절절이 가슴을 후벼팠을 것이다.

또 아버지일로 마음이 너무 괴롭고 삶이 힘들 때는 노랫 말의 철새처럼 ‘뱃길에 훨훨날아’ 어디론가 자유롭게 훌적 떠나고 싶은 마음도 들었을 거라고 추측해 본다. 그러나 그 노래가 어머니의 애달픈 심정을 달래주기도 했겠지만 역설적으로 고달픈 현실을 이겨내게 해준 힘이 되기도 했으리라 여겨진다. 이후 큰 형이 자리를 잡으면서 형님 내외가 오랜 기간 부모님을 서울에서 살뜰히 잘 모셨다. 큰 형이 해외근무를 가게 되면서 막내형과 나를 결혼하기 전까지 뒷바라지 하셨다. 그리고 결혼한 막내형 집에 두 분이 같이 지내다가 다시 고향집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한 인간의 삶은 어머니의 잉태로부터 시작하며, 죽음이란 다시 자신을 존재하게 해준 어머니에게로 돌아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어쩌면 다시는 어머니에게서 못 듣게 될 지도 모를 조미미의 ‘바다가 육지라면’ 가사를 게재하며 글을 마칠까 한다.

얼마나 멀고 먼지 그리운 서울은

파도가 길을 막아 가고파도 못갑니다

바다가 육지라면 , 바다가 육지라면

배 떠난 부두에서 울고 있지 않을 것을

아~~바다가 육지라면 이별은 없었을 것을

 

어제온 연락선은 육지로 가는데

할 말이 너무 많아 하고파도 못합니다

이 몸이 철새라면, 이 몸이 철새라면,

뱃길에 훨훨 날아 어데든지 가련만은

아~~바다가 육지라면 이별은 없었을 것을.

<프로매치코리아 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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