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어, 피라미, 버들치, 잉어, 송사리, 미꾸리, 미꾸라지, 뱀장어, 메기, 가물치, 숭어, 송어, 은어, 빙어, 농어, 연어, 쏘가리, 배가사리, 꺽지, 가시고시, 꾹저구…'
어릴 적 이런 민물고기의 이름은 일부러 외울 필요도 없었다. 여름철 냇가에서 미역을 감으면서 절로 듣고 보고해서 알던 고기이름들이다. 날이 하도 더워 문득 어릴 적 개구쟁이 시절 멱을 감고 고기 잡던 추억이 떠올라 서재에 있던 민물고기 도감을 꺼내 봤다. 『우리 민물고기 백 가지』(최기철 글 이원규 사진, 현암사, 1994)의 첫 장을 넘긴다. 머리말이 나온다.
‘나는 누구인가? 우리 민물고기 30종 이상을 알고 있는 유망한 사람인가. 열 종 밖에 모르는 평범한 사람인가. 그렇지 않으면 열 종도 모르는 불행한 사람인가. 어린 시절에 냇가에서 미역을 감아 보지 못한 사람, 물장구치거나 자맥질을 해보지 못한 사람, 모래밭과 자갈밭과 풀밭을 달려보지 못한 사람, 새소리 물소리 벌레소리를 들으며 숲길을 걸어보지 못한 사람이 과연 건전한 정서를 지닌 한 사람으로 자랄 수가 있을까? 그런 사람이 사람의 바탕을 이루는 창의성과 뚝심과 진실성을 어디에서 얻을 수 있다는 말인가’.
너무나도 낯익었던, 그러나 이제는 아련한 기억 밖에 없는 그런 민물고기 사진을 보면서 잠시 어린 시절로 되돌아갔다. 시골에서 초중학교를 다닐 때 학교 인근 개울에는 붕어 피라미 버들치 송사리가, 논 고랑물에는 뱀장어, 미꾸라지가 많아 동네 형들과 얼마나 즐겁게 잡으러 다녔던가.
이 책의 저자는 대전에서 태어나 서울사대 생물학과 교수, 한국동물학회 회장, 문화재위원, 한국육수학회 회장, 한국담수생물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했던 고 최기철 박사(1910~2002)이다. 우리나라 휴전선 이남 땅에 150종의 민물고기가 살고 있다는데 이 책에 소개된 민물고기만 100종이 넘는다. 이 책에는 최 박사를 포함한 민물고기 탐구가들이 30여 년 동안 전국 방방곡곡을 돌면서 조사한 84만4530마리의 민물고기 이야기가 소개돼 있다.
나는 이 책을 보면서 생각해본다. 최 박사가 민물고기 30종 정도는 알아야 한다는 이유를. ‘긴몰개, 몰개, 각시붕어, 흰줄납줄개, 밀어, 동사리, 기름종개, 납자루, 쉬리, 동자개, 갈겨니…’ 등의 이름을 더하니 30종이 넘는다. 지금 보니 10여종은 알겠는데 나머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한다. 민물고기 30종이란 많은 숫자이지만 예전에 우리 주변에서 절로 볼 수 있었던 종이었다. 최 박사는 “민물고기는 우리와 같은 생태계 안에서 살고 있다. 민물고기가 살지 못하는 세상에선 우리도 살 수 없다”고 머리말에 덧붙였다. 과연 우리들이 추구하는 발전이란 무엇인가. 1인당 GDP가 5만 달러가 된다한들 사라진 민물고기 몇 종을 되살릴 수 있을 것인가.
굳이 물고기만이랴. 나는 과연 우리나라 나무나 풀꽃을 몇 종이나 아는 사람인가. 나는 과연 우리 새를 몇 종이나 아는 사람인가. 제비를 조류도감 없이는 구별할 수 없는 시대, 복사꽃 살구꽃을 한 번도 제대로 보지 못한 아이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교육의 목표 중 하나가 교양인(敎養人)을 길러내는 것이다. 사전적 의미의 교양인이란 지식이나 정서, 사회생활을 바탕으로 길러진 고상하고 원만한 품성을 지닌 사람을 말한다. 독일의 철학자로 베를린자유대학 교수였던 페터 비에리(Peter Bieri)의 『페터 비에리의 교양 수업』(2018)에서 “삶의 방향성, 깨어 있음, 자아 인식, 상상력, 자기 결정, 내적 자유, 도덕적 감수성, 예술, 행복. 이 모두를 다 갖춘 사람을 우리는 흔히 교양인이라고 부른다”며 “교양인의 삶을 정의한다는 것은 교양의 가치를 질문한다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그는 “교양인은 배운 자와는 다르다. 교양은 특정한 방식으로 존재하고자 하는 의식과 노력의 결과물이며, 인간으로 생존하기 위해 반드시 갖춰야 하는 것이 바로 교양이며 교양인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결국 행복한 삶을 향한 여러 갈래의 길을 발견하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비에리 교수는 “교양인이 될 때 비로소 우리는 행복의 길을 찾을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우리들은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 이러한 행복한 삶의 기반이 되는 중산층 대열에는 끼이려고 나름 노력들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중산층(中産層)의 사전적 의미는 우리 사회에서 교육의 기회가 많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계층을 말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통상적으로 중위소득의 75%에서 200% 구간을 중산층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2022년 한국 1인 가구의 중산층 월 소득은 145만원에서 389만원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나라의 현실은 2022년 2월 현재 1인 가구 기준 월 686만원, 부동산 및 금융자산 9.4억원 정도 돼야 중산층으로 인식한다고 한다(한국경제신문, 2022년 4월 7일).
인터넷을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중산층의 기준을 알 수 있다. 중산층은 경제력이나 사회문화적 수준이 중간 정도이면서 ‘스스로 중산층 의식이 있는’ 사회집단을 가리키는 용어다. 한국 사회에서 통속적으로 회자되는 중산층 기준은 △부채 없는 30평대 이상의 아파트 소유 △월 급여 500만 원 이상 △예금 잔고 1억 원 이상 △2000cc급 중형차 보유 △해외여행 연 1회다(2012년 직장인 상대 조사, 신동아, 2016년 4월 4일). 통계청이 적용하는 중산층 기준은 중위소득의 50~150%에 해당하는 사람이다. 2014년 기준 균등화 중위소득은 월 187만8000원. 이 기준대로라면 중산층 비율은 전체 국민의 65.4%에 달하지만 통속적으로 회자되는 중산층 기준과는 거리가 있다.
프랑스의 중산층 기준은 어떨까? 조르주 퐁피두 전 프랑스 대통령이 ‘삶의 질(Qualite de vie)’로 언급한 프랑스 중산층의 기준은 △외국어 하나 정도는 구사할 것 △직접 즐기는 스포츠가 있을 것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있을 것 △손님 대접이 가능한 요리 실력을 지닐 것 △‘공분(公憤)’ 에 의연히 참여할 것 △약자를 도우며 봉사활동을 할 것 등이라고 한다.
영국 옥스포드대가 제시한 중산층 기준은 △페어플레이를 할 것 △자신의 주장과 신념을 갖고 있을 것 △독선적으로 행동하지 않을 것 △약자를 두둔하고 강자에 대응할 것 △불의, 불평, 불법에 의연히 대처할 것 등을 꼽고 있다. 미국 공립학교에서 가르치는 중산층 기준은 △자신의 주장에 떳떳할 것 △사회적인 약자를 도울 것 △부정과 불법에 저항할 것 △탁자 위에 정기적으로 구독하는 비평 잡지가 놓여있을 것 등이라고 한다.
물론 나라별로 연구자별로 중산층 기준은 다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중산층 기준은 너무나 물질적인데만 치우쳐 있다. 유럽이나 미국의 경우 중산층 기준은 우리가 생각하는 교양인의 자격에 가까운 정신적인 것이 강조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정말 이제 우리도 물질적 삶을 넘어 행복한 삶에 대해 고민을 해보아야 할 것 같다. 끝없이부동산 광풍 속에 ‘영끌족’의 삶을 살도록 강요하는 나라, 오로지 학벌, 연봉, 아파트평수, 자가용 브랜드로 사람을 평가하고 ‘사회적 헌신’이라고는 눈꼽 만큼도 없는 그런 중산층 대열에 끼기 위해, 남에게 보이는 삶을 위해 남은 삶을 살아야 할까? 오늘부터 우리 주변의 풀꽃, 새, 민물고기 등 더불어 살아가는 생물들에게도 관심을 갖도록 노력해보아야 겠다. “소유냐 삶이냐?”를 한번 쯤 화두로 삶고 하루하루를 새롭게 출발했으면 싶다.
<경성대 환경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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