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7 - 숨어 사는 선비일지라도 치세의 경륜을 품어야 한다.
높은 벼슬에 있더라도 산림에 묻혀 사는 풍취가 없어서는 안 되며
산림에 묻혀 있을지라도 모름지기 치세의 경륜을 품어야 한다.
- 居(거) / 處(처) : ~에 있다. (거하다 / 처하다)
- 軒冕之中(헌면지중) : 높은 벼슬을 뜻함. 軒은 대부(大夫)의 수레, 冕은 대신(大臣)의 관(冠).
- 山林的氣味(산림적기미) : 산림에 묻혀 사는 은자(隱者)의 고결한 풍취. 氣味는 멋, 정취(情趣).
- 林泉之下(임천지하) : 세상을 버리고 은둔하기 알맞은 곳. 수목이 울창하고 샘물이 흐르는 산속.
- 廊廟(낭묘) : 廊은 궁중의 복도, 廟는 종묘(宗廟), 곧 조정(朝廷)을 뜻함.
- 經綸(경륜) : 나라를 다스리는 일. 經은 원래 ‘피륙의 세로로 놓인 실’ 로, ‘가로로 오가는 실’ 인 緯와 대(對)를 이루는 단어이다. 綸은 ‘실을 정리하다, 고르다’ 는 뜻으로 전(轉)하여 ‘다스리다’ 의 뜻을 갖는다.
▶나아가면 곧 대부요 물러나면 곧 선비라, 이를 함께 일러 사대부라 한다.
조선조 사대부들의 처세관(處世觀)을 한 마디로 말하면, ‘나아가면 대부요, 물러나면 선비라’ 할 것이다. 비록 벼슬길(宦路환로)에 나가지 않았지만 초야에 묻혀 있는 선비들을 일컬어 ‘산림(山林)’ 이라 칭하였고 이들이 곧 ‘재야(在野)의 선비 그룹 - 사림(士林)’ 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비록 몸은 초야에 있지만 언제든지 현실 정치 속에 참여할 준비를 갖추었으니, 이것이 바로 ‘치세의 경륜’ 인 것이다. 지금은 조정에서 벼슬을 하고 있지만 세상의 흐름이 자신의 뜻과 맞지 않을 때에는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사직 상소를 올리고 낙향하여 초야에 묻힐 것을 항시 각오하고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묻혀 사는 이의 즐거움’ 인 것이다.
조선(朝鮮)은 사대부들이 세운 국가였다. 조선의 지배계급이었던 양반은 곧 사대부를 뜻한다. 중국 고대의 신분제도를 보면, 천자(天子)와 제후(諸侯) 그리고 관료계급인 대부(大夫)와 사(士), 그리고 백성인 서인(庶人)이 있었다. 우리 조선조 사회는 양반과 상민의 2대 계급으로 양분되었는데 여기서 양반이란 바로 사대부를 뜻한다. 일반적으로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질서를 말하는데 여기서 사는 양반계급이며, 상민에 있어서 농공상의 서열을 정하여 대우했다는 것이다. 조선조(朝鮮朝)에서 대부(大夫)는 4품 이상의 벼슬아치를 말하고 사(士)는 5품 이하의 하급관리를 뜻하였지만, 일반적으로 조정의 부름을 받아 벼슬자리에 오르면 대부가 되는 것이요, 물러나 초야에 은둔하면 선비라 불렀다.
역사적으로 ‘사대부’ 라는 ‘독서인(讀書人)’ - 지식인 계급이 생겨난 것은 중국 송(宋)나라 때로 우리나라는 송대의 성리학(주자학)을 받아들인 고려 중엽부터 신진사대부 계층이 등장하여 결국 이들에 의해 조선조가 개창된 것이다. 이들은 전문적인 관료집단으로 고려의 귀족이나 호족(豪族)들과 달리 신분이 세습되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를 통해 일단 관료집단에 들어가고 이후 조정의 부름을 받아 벼슬살이를 하게 된다. 벼슬에서 물러나도 조세와 군역의 의무를 면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특혜는 자녀들에게도 양반이란 신분으로 세습되었다. 즉 귀족과 달리 벼슬만은 세습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렇듯 사대부는 관료계급으로 현직 관료와 물러난 퇴임 관료 그리고 예비 관료까지 포함하니 오늘날로 말하자면 거대한 관료 인프라였던 셈이다.
그런데 정작 중국과 달리 왜 조선조에는 그 많은 사대부들에게 이러한 특혜가 주어진 것일까? 그것은 조선이라는 국가는 사대부들이 세운 사대부들의 나라였기 때문이다. ‘민심(民心)이 천심(天心)’ 이라는 맹자의 역성혁명(易姓革命)에 근거하여 백성을 위해 만든 나라였지만 사실상 조선은 사대부들이 만든 사대부들만을 위한 나라였던 것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조선조의 건국은 맹자의 정치사상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맹자에 의하면 모든 사람들은 항산(恒産)이 있어야 항심(恒心)을 갖는데 오직 선비(士)만은 항산이 없어도 항심을 가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들의 항심이란, 개인의 생존과 안위와 부귀공명의 욕심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백성을 위하여 산다는 것이니 이들만큼은 일하지 않아도 백성들이 먹여 살려야 한다는 것이 맹자의 지론이다. 여기서 맹자는 ‘다스리는 자’ 와 ‘다스림을 받는 자’ 의 차이를 구분하며 ‘마음이 수고로운 자’ 와 ‘몸이 수고로운 자’ 의 신분 질서를 정당화하면서 ‘다스림을 받는 자’ 는 ‘다스리는 자’ 를 먹여 살려야 하는 의무가 있음을 당당히 천명하였던 것이다. 유교적 이상사회를 이루기 위한 맹자의 정치사상-역성혁명과 이 엄청난 계급이론-사대부의 소명이론은 오늘날까지 관료주의와 그 제도를 뒷받침하는 사상으로 알게 모르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당대의 현실은 어떠했던가? 그 거룩한 벼슬자리는 개인의 영달과 가문의 부귀영화와 나아가 당파의 집권 야욕으로 얼룩졌으며, 오로지 백성을 위한 존재로 소명을 받은 벼슬아치들은 탐관오리(貪官汚吏)가 되어 가렴주구(苛斂誅求)를 행하였으니,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은「양반전」이나「호질(虎叱)」에서 이 전도(顚倒)된 현실을 신랄(辛辣)하게 풍자(諷刺)하고 질타(叱咤)했던 것이다.
▶이른바 산림(山林)이란?
조선시대에 과거를 통하지 않고도 늦게 출사하는 경우도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산림(山林)의 추천에 의하여 가능하였다. 산림은 ‘재야(在野)의 선비 그룹’ 을 지칭하는 말로 조선 중기 이후 사림(士林)이 정계에 진출하여 정권을 장악한 이후에, 과거를 통하지 않고 재야의 선비로 학식과 덕망을 갖춘 선비에게 전격적으로 관직을 제수하는 인재등용제도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는 고려시대에 과거제가 실시되면서 귀족들에게 부분적으로 베풀었던 음서제(蔭敍制)가 사림에게 허용된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었고, 숨어 있는 인재를 발탁한다는 본래 취지와 달리 붕당정치의 폐단을 낳았으니 긍정적 측면보다는 부정적 폐해가 컸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시골의 촌부일지라도 상당한 정치적 견해를 피력할 정도로 한국인들은 정치의식이 매우 높다. 한국인의 과도한 정치적 관심이나 성향도 따지고 본다면 이러한 사림문화의 유습이라고 할 수 있으니, 초야에 묻혀 있는 선비일지라도 단순한 독서인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경륜을 닦아 기름으로써 언제든지 조정에서 부르면 전문 관료로서 출사할 준비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의 학문이란 것이 사서삼경을 달달 외우며 주자학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기론(理氣論)이나 인성물성론(人性物性論)을 따지는 것이었으니 실제 백성들의 삶을 위한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실학(實學)이 아니라 한갓 탁상공론(卓上空論)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었다.
<배움의 공동체 - 학사재(學思齋)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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