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다형 시인의 '시 밥상' (19)묵독 / 조재형

전다형 승인 2019.11.14 10:35 | 최종 수정 2019.11.14 10:48 의견 0

묵독 / 조재형

당신을 읽는 중입니다
읽을수록 손을 놓을 수 없습니다
가슴을 열람하고
옆구리를 빌립니다
모음으로 된 당신의 뼈
자음으로 된 당신의 살
감탄 부호로 찍힌 음성
수억의 관문을 뚫고 입성한 내가
가장 잘한 일이 있다면
당신을 열독한 일입니다
언제일까요
폐문을 맞이하는 날
이별을 박차고 이 별을 나설 테지만
당신이라는 양서를 택한 나는
우등 사서司書입니다
누군가 당신을 복사할까봐
차마 낭독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아무도 모르게
당신을 외웁니다

◇조재형 시인은

▷2011년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 『누군가 나를 두리번거린다』 등
▷제15회 푸른시학상 수상
▷현재 시골에서 법무사로 일하고 있으며, 틈틈이 시를 쓰고 있다.

▶조락과 결실의 계절에 이런 고백을 듣는 당신은 누구일까? 소리조차 낼 수 없는 뜨거운 묵도의 자세 앞에서 나는 데인다. 당신은 참 좋겠다. 무궁무진의 경지에서 뜨겁게 읽어주는 이가 있는 당신은 사람일까? 사물일까? 사랑의 8부 능선에서 이렇게 완곡하게 읽는 당신이 나라는 착각에 빠져본다. 읽을수록 마음이 푹푹 빠져드는, 손을 놓을 수 없는 열락을 본다. ‘당신’은 온 몸이 ‘존재의 집’이면서, ‘언어의 양분’인 묵독의 세계는 무궁무진의 세계이리라.

닿는 것이 극지이며 궁극인 당신, 가슴과 옆구리가 모음이면서 뼈인, 자음이면서 살인, 모든 것이 감탄사와 부호며 음성인, 수억의 관문을 뚫고 입성한 그대라는 성(城), 그대를 차지한 그대가 가장 잘한 일이라는 열독, 그 열독을 엿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런 절절한 고백을 듣는 당신은 세상을 다 가진 당신이며, 우주를 들인 사람, 폐문을 닫는 날이 온다 해도 이 별을 박차고 이 별을 떠난다 해도 슬프지 않겠다.

이런 양서 한 권 어루만지며 읽고 싶다. 길 위에서 길을 잃거나, 사랑 안에서 사랑을 잃을 때, 당신을 켜고, 당신을 읽을 수 있는 당신이 부럽기만 하다. 나도 누군가에게 양서라는 최고의 거름이고 싶다. 당신을 양서로 선택한 마음 밝은 당신은 우등 사서가 맞다. 우등 사서 몰래 양서를 필사하고 싶은 유혹을 즐긴다. 어떤 고문도 감수할 수 있겠다. 사랑의 종신형도 마다하지 않겠다. 우등사서가 몰래 외우는 ‘당신’을 낭독하다, 그 웅숭깊은 묵독에 사로잡힌 내 가을 향낭이 불룩하다. 

전다형

◇전다형 시인은

▷경남 의령 출생
▷부경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졸업, 박사수료
▷2002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수선집 근처'(푸른사상사)
▷연구서 '한하운 시 고통 연구'
▷제 12회 부산 작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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