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다형 시인의 ‘시 밥상’ (23) 늦은 기별 / 윤성택

전다형 승인 2020.02.17 02:43 | 최종 수정 2020.02.17 09:23 의견 0

늦은 기별 / 윤성택

편지가 우편낭 속에서 귀퉁이를 조금씩
뭉개며 사연을 쏟는다

한번쯤 찢어본 엽서가 있듯
기다리고 기다리다

스스로 편지가 되어 버린 사람이
눈(目)을 봉하고 눈물을 붙인다

우체통에 편지를 넣을 때
손등에 스치는 느낌,
다시 꺼낼 수 없는 안으로

고요히 밀랍처럼 말라가는 문장들

당신은 내 눈동자를 열고 다이얼을 돌린다

-『모던포엠』 2019년 11월호 수록-

◇윤성택 시인은

▷1972년 충남 보령 출생. 2001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 시집 『리트머스』, 『감(感)에 관한 사담들』
▷ 산문집 『그 사람 건너기』, 운문집 『마음을 건네다』
▷ 2014년 한국시인협회 젊은 시인상, 2019년 시와표현 작품상 수상

▶ 이 시는 수동적 소통의 방식에서 능동적 소통방식으로의 이행을 보여준다. 눈(읽기)에서 귀(듣기)로 문자(시각)에서 소리(청각)로 신체의 감각기관에 의해 마음이 움직인다. 오늘날은 빠른 전파를 타고 상대방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속전속결로 이루어진 사랑은 이별도 빠르다. 현대 사회의 흐름과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는 손 편지를 통해 “고요히 밀랍처럼 말라가는 문장”과 “다시 꺼낼 수 없는 안”에 대해 생각한다. “눈(目)을 봉하고 눈물을 붙인” 편지를 “우체통에 편지를 넣을 때/ 손등에 스치는 느낌”을 가만히 짐작해 본다.

기다림은 수동(受動)의 천형(天刑)을 지닌다. 시인이 보낸 손 편지 행간에 숨겨둔 사랑을 읽었을까? 손 편지가 사라진 지금은 이런 기쁨이 없다. 불룩한 우편 낭 싣고 달리는 자전거도 사라진지 오래다. 아날로그적 뭉근한 사랑을 담보하고 있는 이 시는 기다림의 미학을 잘 보여준다. 시인은 「늦은 기별」을 “기다리고 기다리다// 스스로 편지가 된 사람”이다. 이 기다림은 천형의 형틀을 쓰고 누군가에게 능동(能動)의 사람이었으면 하는 기대를 담고 있다. 그러나 마지막 연에서 자신의 홍채가 다이얼이 되면서 수동의 천형을 벗어난다.

안중지인(眼中之人), 눈은 그 사람의 심상을 담고 있는 기관이다. “당신은 내 눈동자를 열고 다이얼을 돌린다”고 진술한다. 이 진술은 편지와 전화 사이,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이 양날의 검을 보여준다. 손 편지는 자신만의 필체로 기록한 서간체다. 이런 유니크한 서간체가 사라지는 것이 안타깝기도 하다. 시인은 편지 형식에서 전화 방식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지만 여전히 수동의 자세다. 그러나 시인의 「늦은 기별」이 내게 ‘너 눈동자를 열고 다이얼을 돌려주길 기다리는 당신이 있나?’ 단도직입적인 물음을 던졌다. 나는 ‘발설하지 않아야 오래 거느릴 수 있기에’ 즉답을 피했다.

전다형

◇전다형 시인은

▷경남 의령 출생
▷부경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졸업, 박사수료
▷2002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수선집 근처'(푸른사상사)
▷연구서 '한하운 시 고통 연구'
▷제 12회 부산 작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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