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다형 시인의 '시 밥상' (28) 서정시 / 권정일

전다형 승인 2020.10.13 23:02 | 최종 수정 2020.10.13 23:33 의견 0

서정시 / 권정일

마당을 쓸었다
마당을 쓰는 일은 흔치 않은 일
오동나무 긴 그림자
적빈이다

목쉰 개 컹 컹 컹, 아랑곳없다
목줄 푼 마당의 정서

고스란히 오동 꽃 떨어진다 운필인 양 말간 그늘을 휘호하는 오동 세상 칡뿌리로
글을 써 탈속했다는 갈필 말고, 우거진 세상 습습 찍어 관조했다는 습필 말고

갈필 습필 반작하여야 오동에 큰 그늘

어떤 묵즙이 벼루 끝으로 꽃잎을 불러내었나
그늘 한가운데 명문장를 걸어 두고 휘장처럼

펄럭인다
아예 펄럭인다

自己를 풀어 마당 가득 큰 뜻을 내려놓는 오동은 지는 것이 아니라 일필을 기다리는 큰 붓

부드러우나 단단한 육필 붓끝을 따라가다 매무새를 고쳐 쓴다

-《어디에 화요일을 끼워 넣지》(파란, 2018) 수록

◇권정일 프로필 : 충남 서산 출생, 1999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으로 『마지막 주유소』, 『화요일을 어디에다 끼워넣지』 등.

[유튜브 / 강남불교대학]

⯈마당을 쓸고 있는 주다반탁가朱茶半託迦를 만났다. 시인의 서정을 엿보는 일이 부처가 되는 주다반탁가의 일상을 엿보는 것과 같음이겠다. 일자무식한 주다반탁가가 마당을 쓸면서 마당을 쓸어야 하는 까닭을 깨우치듯 시인이 시를 쓰는 일 또한 도를 닦는 일과 같음이겠다. “오동나무 긴 그림자/적빈”이란다. 티끌 하나 없이 잘 쓸어놓은 마당을 본다. “목쉰 개 컹 컹 컹, 아랑곳없다/목줄 푼 마당의 정서”라 한다. 이는 수비水飛의 자세다. 모두를 다 가라앉힌 적막이다. 반구저기反求藷己, 자기를 비추는 거울이다. “고스란히 오동 꽃 떨어진다” 오동 꽃 떨어진 자리 열매 맺는다. 지지 않고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임을 자연이 온 몸으로 가르친다.

묵즙이 벼루 끝을 불러내는 일이 오동나무 끝에 꽃을 피우는 일이겠다. “운필인 양 말간 그늘을 휘호하는 오동 세상 칡뿌리로 글을 써 탈속했다는 갈필 말고,/우거진 세상 습습 찍어 관조했다는 습필 말고//갈필 습필 반작하여야 오동에 큰/그늘//어떤 묵즙이 벼루 끝으로 꽃잎을 불러내었나” 여름 이글거리는 태양과 태풍의 눈과 비바람을 이긴 오동잎 그림자 적빈에 들어, 묵즙이 벼루 끝으로 불러낸 꽃잎이 지고 꽃 진 자리 이 큰 그늘, 서정의 뜰은 잘 마른 시들이 다글거리겠다.

조락의 계절, “그늘 한가운데 명문장 걸어 두고 휘장처럼//펄럭인다/아예 펄럭인다//自己를 풀어 마당 가득 큰 뜻을 내려놓는 오동은 지는 것이 아니라 일필을 기다리는 큰 붓//부드러우나 단단한 육필 붓끝을 따라가다 매무새를 고쳐 쓰”잖다. 물 오른 그리움이 마당가를 뒹구는 가을, 이 시가 부추긴다. 오동나무 그림자 큰 붓에 찍어 ‘사랑한다’ 육필 고백? 이 아름다운 수작이 그대에게 닿기를! 

◇전다형 시인은

▷경남 의령 출생
▷부경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졸업, 박사수료
▷2002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수선집 근처'(푸른사상사), '사과상자의 이설'(상상인)
▷연구서 '한하운 시 고통 연구'
▷제 12회 부산 작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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