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다형 시인의 '시 밥상' (26)박남희 / 고집

전다형 승인 2020.07.15 11:22 | 최종 수정 2020.07.15 15:42 의견 0
[출처 : 픽사베이]

고집 /​ 박남희

풀잎 위의 빗방울이 고집을 피우고 있다
아래로 뛰어내릴 마음이 없다는 듯
대롱대롱 매달려 화사한 햇빛을 끌어 모으고 있다

빗방울 속의 햇빛이 고집을 피우고 있다
언젠가 무지개를 피워 올리겠다는 듯
제 안의 색을 감추고 물방울 속에 꼭꼭 숨어있다

햇빛의 몸속에 숨어있는 색이 고집을 피우고 있다
세상의 모든 것들에게 색을 나누어주겠다는 듯
햇빛을 뚫고 빗방울의 장력을 뚫기 위해 꿈틀거리고 있다

빗방울을 매달고 있던 풀잎이 고집을 피우고 있다
빗방울 투명한 눈망울이 제 것이나 되는 양
부릅 뜬 눈 속에 빗방울을 끝끝내 눈물처럼 말아 쥐고 있다

그 아래
고집을 버린 것들이 풀잎의 뿌리를 키우고 있다
기꺼이 썩는 것과 스미는 것이 봄을 밀어올리고 있다

고집은 늘 아래가 두렵고
고집을 버린 것들은 항상 위가 허전하다

​- 웹진 『시인광장』 2014년 4월호 발표

■박남희 시인 약력 : 1996년 경인일보 199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폐차장 근처』 『이불속의 쥐』 『고장난 아침』 『아득한 거리였을까』, 평론집 『존재와 거울의 시학』 등이 있다.

■고집이란 시 한 편 읽고 뜨끔하다. 반구저기의 시간에 들게 한다. 내 고집은 어떤 유형일까? 나를 알아주라는 인왕자의 고집, 자존심을 건드리면 용납 못하는 관왕자 고집, 내 식대로 할 거야 재왕자 고집, 네가 다 틀렸어 내가 맞아, 식상의 고집이 있다. 이 고집은 자기를 갉아먹기도 하고 때로는 꿈을 실현하는 지렛대가 되기도 한다.

러시아의 식량학자 니콜라이 바빌로프(1887-1943)는 노새를 타고 전 세계를 누비며 38만 종이 넘는 발아 가능한 토종 씨앗을 모아 종자은행을 설립했다. 그러다 세계 2차대전 때 러시아를 침공한 히틀러 군대에게 씨앗을 빼앗기고 굶어죽게 된다. 니콜라이 바빌로프의 이런 고집은 남을 살리는 고집이며 하늘의 뜻을 알아차린 신념이다.

“고집은 늘 아래가 두렵고/ 고집을 버린 것들은 항상 위가 허전하다”고 말한다. 트리나 플러스가 쓴 『꽃들에게 희망』에서 노랑 애벌레처럼 오르기를 포기하고서야 나비가 되듯 “고집을 버린 것들이 풀잎의 뿌리를 키우고// 기꺼이 썩는 것과 스미는 것이 봄을 밀어 올린다”고 한다. 풀잎에 매달린 빗방울 속에 천심을 발견한 이 시가 내게 묻는다. 누군가의 거름으로 여기까지 왔냐고?

전다형 시인

◇전다형 시인은

▷경남 의령 출생
▷부경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졸업, 박사수료
▷2002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수선집 근처'(푸른사상사), '사과상자의 이설'(상상인)
▷연구서 '한하운 시 고통 연구'
▷제 12회 부산 작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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