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다형 시인의 ‘시 밥상’ (25)풍경의 관계학 / 이정모

전다형 승인 2020.04.11 16:31 | 최종 수정 2020.04.11 17:07 의견 0
창과 풍경
창과 풍경 그리고 빗방울 [사진=픽사베이]

풍경의 관계학 / 이정모

세상 만물에 어둠이 내려도
나는 창 하나만큼의 어둠을 볼 뿐

나의 방 안에서
가장 잘 익은 것은 침묵,
의심에 몸을 맡기지 않은 것이다

이팝 꽃은 보릿고개가 피운다 하지만
이밥은 보리를 모르는데

세월의 한켠을 견뎌온 불이
바람처럼 일어나고 빛처럼 사라지기도 하고
누군가의 눈물로 닦기도 하는 창이라는데

나무는 햇살만큼의 키를 키우고
밤은 내려와 생각에 망명정부를 세우지만
이곳의 날씨가 바뀌는 건
가뭄도 뿌리의 깊이 탓도 아니다

세월의 두께만큼 닦아야 드러나는 아린 거울
문장도 어둠 속 풍경이다
간절함이 없다면,

▶이정모 시인 약력: 강원도 춘천출생, 2007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기억의 귀』 , 『제 몸이 토로로다』, 『허공의 신발』 이 있다.
현재: 부산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 이 시는 시인의 시학이다. 침묵의 자세로 다 말한다. 어둠과 직면하는 면벽의 자세다. 시인은 어둠의 세계에 던져진 존재다. 나만의 방에서 창 하나만큼 어둠을 본다. 이 창은 시인의 눈이다. 이 눈은 아린 거울이다. 아린 거울 속 투명한 수채화 한 폭, 풍경의 관계학에 빠져들었다. 이 풍경을 이루는 질료는 어둠, 창, 방, 잘 익은 침묵, 의심, 불, 바람, 빛, 눈물, 망명정부다. 이들이 빚은 풍경의 관계학은 시인이 말기 암과 싸우는 시간으로 짐작된다. 죽음의 문턱에서 인간존재에 대한 근원적 물음으로 '잘 익은 침묵'과 마주하고 있다. 사유의 극대화로 풍경의 관계학은 무르익는다. 시인은 망명정부를 세운 단독자로 의심에 몸을 맡기지 않는다.

어둠의 공간에 던져진 시인은 암전 상태다. 다시 올릴 막을 예비하는 도정에 있다. 바깥을 끄고 자기를 만나는 고독한 시간, “세월의 두께만큼 닦아야 드러나는 아린 거울//문장도 어둠 속 풍경이다” 이렇게 잘 닦아놓은 아린거울을 들여다보는 독자의 마음 또한 아리다. 시인은 “이팝 꽃은 보릿고개가 피운다 하지만//이밥은 보리를 모른”다고 한다. 자연의 섭리를 통해 한 생을 달군 불이 바람으로 인해 빛과 재가 되는 과정을 반추하고 있다. 시인은 다 자기 탓이라고 고백한다. “나무는 햇살만큼의 키를 키우고//이곳의 날씨가 바뀌는 건//가뭄도 뿌리의 깊이 탓도 아니”라고 말한다.

시인이 은유적으로 표현한 생과 소멸의 세계에 대해 “세상 만물 어둠이 내려도 /나는 창 하나만큼의 어둠을 볼 뿐”이라 한다. 시인은 침묵을 통해 자기가 처한 상황에 대해 직면하고 응시한다. 그리고 자신을 믿는다. “나의 방 안에서//가장 잘 익은 것은 침묵,”이라 말할 수 있게 된다. 그 침묵의 배면에는 “의심에 몸을 맡기지 않은 것이다”라고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암 투병에서 회복할 수 있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음이겠다. 비트겐슈타인은 ‘침묵’을 ‘실존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내가 지금 여기에 있다’라고 한 것처럼 자기만의 방에서 침묵의 형식으로 쓴 시인의 「풍경의 관계학」이 깊디깊다. 

전다형

◇전다형 시인은

▷경남 의령 출생
▷부경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졸업, 박사수료
▷2002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수선집 근처'(푸른사상사)
▷연구서 '한하운 시 고통 연구'
▷제 12회 부산 작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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