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버리기 / 정한용
봄철이 다가오기 전
전세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데
가난한 우리 가족은 이사를 간다.
10년 눌러 산 집을 더 떠난다
우선 묵은 때 벗기듯 버릴 것들을 가차 없이 처단한다
너무 많은 것을 등짐처럼 지고 살았다.
처분 대상 일호 품목은 책,
날씨 풀린 길일을 택해 천 권의 책을 분리수거함으로 보낸다.
아, 속이 시원하다......할까......해야지......
책 속에 구겨져 있던 글자들이
숨겼던 음모를 폭로하면서 종이를 찢고 뛰어나와 내 눈을 찌를지도 몰라.
자, 계산을 해보자.
(책 한 쪽에 원고지 5장, 그러면 10000자가 들겠군. 한 권을 평균300쪽이라 치면, 도합 30만 자가 버글거리는군. 좋아, 한 단어를 평균 3자로 계산하면, 모두 10만 단어가 책 한 권을 짓는 셈이군. 하이데거 존자께서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 일갈하셨으니, 책은 한 권마다 10만 채의 아파트이니, 아, 가히 도시라 불러도 되겠구나. 삼국지특별시, 혼키호테직할시, 열하일기광역시, 죄와벌시, 님의 침묵시......)
나는 한 권의 책을 버렸고
1억 채의 집을 버렸다.
서민 아파트 한 채에 시가로 수억 원이니, 아, 나는, 물경 수천 조의 돈을 버린 것이렷다.
아프리카 어린이 돕기에 2만 원이 아까워 망설이고 망설이다 겨우 지갑을 연 주제에
로또 백번을 맞아도 불가능한 돈을 날리고도 태평할 수 있다니
그러고도 속이 쓰리지 않다니, 나도 엄청 독한 놈이다.
세상 살 만큼 살았구나.
언젠가 내가 발라놓은 책장의 독을 스스로 찍어먹고
천형처럼 고꾸라질지 몰라.
내게 책을 증정해주신 죄 많은 분들이시여,
언어의 황량한 고해성사여.
- 『거짓말의 탄생』 수록
▶정한용 시인 약력: 1958년 충북 충주 출생.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평론이 당선되고 1985년 <시운동>[2]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얼굴 없는 사람과의 약속](1990), [슬픈 산타페](1994), [나나 이야기](1999), [흰 꽃](2006), [유령들](2011), [거짓말의 탄생](2015), 영문시집[How to make a mink coat] (2015)를 냈으며, 그 외 저서로 [민족문학 주체논쟁](1989 편저), [지옥에 대한 두 개의 보고서](1995 평론집), [울림과 들림](2006 평론집) 등이 있으며, 제 14회 천상병 시문학상과 시와 시학상 수상했다.
현재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시와시학>, <웹진 시인광장>의 편집위원을 맡고 있으며, 문학동인회 [빈터] 대표를 역임했다.
▶이 시는 책에게 올리는 고해성사다. 책을 증정한 분들께도 죄 사함을 받고자 한다. 책은 인류가 만든 최고의 지적재산이다. 책을 통해 세상을 배운다. <파랑새>를 쓴 벨기에 극작가 모리스 메테를링크는 “인생은 한 권의 책이다.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매일 매일 그 책의 한 페이지씩을 쓰고 있다.”고 했다. 이런 책을 버린다는 것은 시인의 세계를 형성한 우주를 버린다는 것과 같으리라. 봄철 이사를 앞두고 10년 눌러산 집을 떠나는 시인은 묵은 때를 벗기듯 버릴 것들을 가차 없이 처단하기로 한다. 처분 대상 일호인 천 권의 책을 분리수거함으로 보낸 자신의 행동에 대한 자책이다.
하이데거 존자가 일갈한 “존재의 집”이 “책 속에 구겨져 있던 글자”들이 “숨겼던 음모가 종이를 찢고 뛰어나와 시인의 눈을 찌를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한다. 모든 삶의 계략과 책략이 들어 있는 “삼국지특별시, 돈키호테직할시, 열하일기광역시, 좌와벌시, 님의 침묵시...”를 버린 시인은 버려서 홀가분하기만 할까? 현실에 순응하는 시인은 갈등한다. 책 욕심이 많은 나는 시를 읽는 내내 슬펐다. ‘시인의 결정이 잘한 결정일까?’ 내게 자문한다. 책이 귀하던 시절, ‘책 속에 길이 있다,’는 속담처럼 앎의 세계를 열어준 책이 영혼의 밥이지 않았든가?
“나는 한 권의 책을 버렸고/ 1억 채의 집을 버렸다./ 서민 아파트 한 채에 시가로 수억 원이니, 아, 나는, 물경 수천 조의 돈을 버린 것이렷다./ 이 큰돈을 날리고도 태평할 수 있다니/ 그러고도 속이 쓰리지 않다니, 나도 엄청 독한 놈”이라 고백한다. “언젠가 내가 발라놓은 책장의 독을 스스로 찍어먹고/ 천형처럼 고꾸라질지 몰라”/ 시인에게 “책을 증정해주신 죄 많은 분들”에게 “언어의 황량한 고해성사”를 한다. 시인은 책이라는 ‘지적재산’을 집이라는 ‘물질재산’을 통해 오늘날 책의 가치에 대해 묻고 있다. 물질에 의해 지적 재산마저 포기해야 하는 가난한 문학인의 비애가 녹아있는 이 시가 겨울나무에게 무릎 꿇고 올리는 사죄가 아닐까? 식목일 나무 한 그루 심지 않은 내 양심도 찔린다.
◇전다형 시인은
▷경남 의령 출생
▷부경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졸업, 박사수료
▷2002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수선집 근처'(푸른사상사)
▷연구서 '한하운 시 고통 연구'
▷제 12회 부산 작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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