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다형 시인의 '시 밥상' (18)걸려 있다 / 황정산

전다형 승인 2019.10.11 12:39 | 최종 수정 2019.10.11 13:03 의견 0
ⓒ전다형

걸려 있다 / 황정산

빈 놀이터 녹슨 철봉에 빨랫줄이 매어 있다
어느 날 없어진 아이들이
빛바랜 난닝구 늘어진 꽃무늬 몸뻬가 되어
거기 걸려 있다
쉬이 늙는 것은 수크령만이 아니다
가벼운 것들이 날아가다 잠시 붙들려 있다
유령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빨래가 철봉에 걸려 놀이터가 비어 있다
난닝구와 몸뻬를 벗고
아이들은 사라진다
매달린 것들은 모두 날아가는 것들이다

놀이터에 빨래가
하나씩 지워지고 있다

빨랫줄에 빈 햇살이 걸려 있다

◇황정산 시인은

▷1993년 《창작과비평》에 평론 발표
▷2002년 《정신과표현》으로 시 발표
▷평론집 『주변에서 글쓰기』
▷주요 논문으로 「한국 현대시의 운율 연구」
▷현재 대전대학교 교수

▶화자는 텅 빈 놀이터에서 놀이터 바깥을 사유한다. 시인은 아파트 근처 놀이터에 앉아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최초의 학습장이었고 교실이었을 서해 바닷가 모래밭과 골목은 시인의 유년을 소환하는 기폭제가 된다. 그곳에서 모래성을 쌓고 허물면서 욕망과 허무를, 그네를 타면서 전진과 후퇴를, 시소와 미끄럼틀을 타면서 오름과 낙차를 배웠으리라.

녹슨 철봉에 매여 있는 빨래 줄에 “어느 날 없어진 아이들이/빛바랜 난닝구 늘어진 꽃무늬 몸뻬가” 걸려 있는 것을 보고 늙어가는 자신을 발견한다. 빨래 줄에 걸린 낡은 옷가지를 보면서 사라진 아이들을 떠올린다. 무용지물이 된 놀이터는 제 기능을 잃어가고 있는 이 시대의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다.

한 아이가 다 자라려면 한 고을이 필요하다고 했다. 마을마다 근사한 놀이터가 있으나 저 출산으로 인해 키울 아이들이 없다. 왁자지껄, 하하, 호호, 깔깔 웃음소리는 귀를 닦아도 들리지 않는다. 화자는 결초보은의 풀 “수크령만 늙는 것이 아니”며 “매달리는 것은 모두 날아가다 잠시 붙들려 있다”고 한다. 노인들과 놀이터가 점점 제 기능을 잃어가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나에게는 마냥 슬픈 어머니 치마폭 놀이터가 가장 그립다.

“놀이터에 빨래가/하나씩 지워”지듯 우리 모두는 언젠가 지상에서 지워질 존재들이다. 이 시는 크로노스의 시간과 카이로스의 시간에 던져진 우리에게 남은 나날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묻는다. 모든 생명이 있는 사물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늙어간다. “빨래 줄에 빈 햇살이 걸려 있”는 봄이 오면 수크령도 파랗게 돋고 왁자지껄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돋아났으면 좋겠다.

전다형

◇전다형 시인은

▷경남 의령 출생
▷부경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졸업, 박사수료
▷2002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수선집 근처'(푸른사상사)
▷연구서 '한하운 시 고통 연구'
▷제 12회 부산 작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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