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다형 시인의 ‘시 밥상’ (17) 그냥 / 신 평
전다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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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2 14:24 | 최종 수정 2019.10.11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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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 신 평
그냥 고추잠자리
살포시 앉은 기와담장 보아요
그냥 햇살을 받고 웃는
들꽃 한 포기 바라보아요
가느다란 바람줄에 실려오는
가을 냄새가 느껴지나요
풀섶에 숨은 고요
그냥 그대로 놔두어요
◇신 평 시인은
▷경주 출생
▷서울대 법대 및 동 대학원 졸업
▷미국, 중국, 일본의 여러 대학에서 수학
▷법관, 경북대학교 로스쿨 교수
▷현재 변호사, 공정세상연구소 이사장
▷저서 : 『한국의 언론법』, 『헌법 재판법』 , 『한국의 사법개혁』 , 『로스쿨교수를 위한 로스쿨』 , 『법원을 법정에 세우다』
▷시집 : 『들판에 누워』
▶ ‘그냥’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았습니다. ‘더 이상의 변화 없이 그 상태 그대로’ 라고 나와 있습니다. 위의 시를 다시 읽어봅니다. “그냥 고추잠자리/살포시 앉은 기와담장”을 보라고 합니다. 신평 시인은 시인이기 이전에 법조인입니다. 모든 사건에서 한 발 물러서서 본질을 보라는 것 같습니다.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세상을 보는 잣대가 <프로크루테스의 침대>을 닮았습니다. 몇 번을 묵독(默讀)으로 읽게 되는 이 시에서 기와담장에 앉은 고추잠자리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카루스의 날개>를 연상시킵니다. 덧없는 욕망으로 인해 바다로 추락하는 이카루스에게는 아리아드네 실타래가 나침반이 되어주지는 못했습니다.
화자는 “햇살을 받고 웃는/들꽃 한 포기”를 그냥 바라보라고 합니다. 왜 우리는 ‘그냥’을 ‘저냥’으로 왜곡하고 오판할까요? 자연은 열매로 허기를 메우고 꽃은 향기로 베풀고 나무는 그늘을 내어주고도 넉넉하기만 한데, 법을 아는 만물의 영장인 사람으로 인해 온통 시끄럽습니다. ”가느다란 바람줄에 실려오는/가을 냄새“에 오감을 맡기고 ”풀섶에 숨은 고요”마저 ‘그냥’ 두라는 당부의 말씀 허투루 듣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시를 읽는 내내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 나오는 ‘바오밥나무의 뿌리’를 생각했습니다. 장미를 닮아 뿌리를 뽑지 않은 어린 새싹이 점점 자라 어느 날 성을 둘러 싼 담을 무너뜨리게 됩니다. 제 마음속에도 뽑지 않은 바오밥나무 뿌리가 혹시 자라고 있나? 자기를 짚어본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를 무너뜨리는 궁극의 끝을 궁굴려보게 하는 “가을의 풀섶에 숨은 고요”를 어루만지자 두근두근 자연의 이두박근이 만져졌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분류된 알라존Alazon이 판을 치는 세상입니다만 현실은 피로사회로의 이행을 부추기지만 이런 때일수록 이 시 「그냥」을 통해 ‘저냥’을 헤아려 볼일입니다.
◇전다형 시인은
▷경남 의령 출생
▷부경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졸업, 박사수료
▷2002년 국제신문 신춘문예등단
▷시집 '수선집 근처'(푸른사상사)
▷연구서 '한하운 시 고통 연구'
▷제 12회 부산 작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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