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간의 소문에 10월 말일에는 유난히 노래방이 붐빈다고 합니다. 이는 쉰이 넘은 중년이라면 그날 <잊혀진 계절>을 흥얼거리게 될 정도로 이 노래가 우리네 삶에 깊이 파고들었기 때문이겠지요.
나는 지금도 당신과 헤어진 10월의 마지막 밤을 기억하며 때늦은 후회를 하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이 너무 슬퍼다는 단순한 줄거린데 왜 이렇게 심금을 울리는지 하여간 5천만 동포를 모조리 중독(中毒)시킨 특이한 노래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노래의 가사에 특별히 심금을 울릴 내용이 있는지 아니면 가수 이용의 가창력이 특별한 건지 살펴보아야 하는데 저는 우선 이 노래의 가사 중 <10월의 마지막 밤>이라는 가사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옛 사람들이 <10월 상달>이라고 부르는 <10월>은 일 년 열두 달의 절정에 해당되는 달입니다. 8월 한여름이 지나고 선득선득한 바람에 이슬이 내리기 시작하는 초가을 9월에는 사과가 익고 밤이 벌며 하늘이 조금씩 높아지기 시작하는 계절, 바야흐로 눈에 별빛을 담기 시작하는 소녀처럼 수줍고 싱그러운 계절입니다. 그런가 하면 벼가 무르익어 황금벌판을 이루고 사과와 배에 단맛이 배어나는 10월은 풍요와 결실로 상징되는 가을의 절정이 됩니다. 그런데 그 10월의 하순이 되면 이슬이 점점 차가워지며 무서리가 내리고 투명한 하늘 가득 서러움이 고이며 낙엽이 지기 시작합니다. 바야흐로 가을이 기우는 조락(凋落)의 11월이 목전에 다가온 것이지요.
10월의 마지막 밤은 그래서 풀벌레의 울음이 가장 애달픈 날이며 사랑을 잃은 사람에게는 그리움이 사무쳐 눈물이 나는 날, 그래서 이 노래의 강력한 흡인력이 파생되는 것입니다.
다음 우리는 이 노래의 결정타인 <이룰 수 없는 꿈>을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상상, 공상(空想), 몽상(夢想), 심지어 망상(妄想)에 이르기까지 우리 인간은 참으로 수많은 꿈속에서 살아가는 좀 별난 종(種)의 생명체입니다.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말처럼 오래 집중하면 현실로 이루어지는 꿈도 있지만 인간의 꿈 자체가 대부분은 부질없는 것이며 이미 이루어질 수 없음을 잘 알면서도 꾸는 꿈, 이루어지기 힘들수록 그 꿈이 더욱 감미롭기 때문에 인간은 더 집요하게 꿈을 꾸며 그 꿈에서 헤어자지 못하는 몽상가와 현실도피자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꿈이 가을에 감이 익어 홍시가 되 듯, 둥지 속의 달걀이 병아리가 되듯 대부분 현실로 나타나면 좋겠지만 관습이나 사회제도, 기후나 자연환경 때문에 이루어지기 힘든 경우도 많고 상대를 설득하거나 내 꿈을 줄여 절반쯤 이루는 경우도 간혹 있지만 그 대부분이 처음부터 이루어질 수가 없는데 그건 인간의 속성이 너무나 크고 아득하며 허황한 꿈을 꾸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꾸는 그 많은 꿈 중에서 가장 심각하고 미묘한 것이 바로 이성간의 꿈, 사랑의 꿈입니다. 누구랄 것도 없이 사춘기시절이 되면 한두 번은 꾸기 마련인 그 황홀한 꿈은 앞뒷집에 살던 갑순이, 갑돌이가 결혼을 하면 좀 싱거운 해피엔딩이 되지만 대부분 앞집의 처녀는 시집을 가고 뒷집의 총각은 목매러 가는 비극이 되는 것이 바로 그 사랑의 속성이며 슬픈 노래와 소설의 모티브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의 대부분은 어찌 된 셈인지 너무 잘난 사내와 고운 여인을 꿈꾸다 그 대부분이 다가설 수 없는 사랑이 되어 종국에는 내 좋아하는 여인이 남의 아내가 되고 남의 어미가 되고 심지어 남의 할미가 되어도 끝끝내 잊지 못 하는 <이룰 수 없는 꿈>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룰 수 없는 꿈>이 그렇게 슬프다는 것은 이룰 수 없는 꿈일수록 더욱 감미로워 점점 더 잊기 어렵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상이 건강한 사내의 땀과 살가운 여인의 정성으로 아이를 낳아 키우며 발전하는 것 같지만 한 편으로는 그렇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때문에 가슴을 쥐어뜯는 사내, 한 평생 한숨소리를 감추며 살아가는 아낙네들 때문에 하늘에는 저렇게 서러운 노을이 지고 땅에는 슬프고 감미로운 노래로 가득 차게 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 <이룰 수 없는 꿈>, 그 끈질긴 미련이 세상의 슬픔과 한숨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예술과 종교, 화해와 용서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소개한 <목로주점>에서 연말이면 낙타를 사서 사막에 가자는 꿈이 현실에서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지만 목로주점의 흐릿한 전등불 아래서 오래 친한 친구와 큰 잔에 술을 붓고 껄껄거리며 이야기를 하는 그 순간에는 어쩜 이루어질 것 같은 착각, 근거 없는 호기가 생겨 어떤 경우에는 삶의 탈출구나 쉼표가 되기도 한다는, 그만큼 감미롭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10월의 마지막 밤>으로 문(門)을 열고 <이룰 수 없는 꿈>으로 막(幕)을 내리는 <잊혀진 계절>은 아름다운 노래를 지나 가슴을 울리는 노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10회를 계획한 <아름다운 노랫말>이 어느 20곡이 가깝습니다. 제가 욕심이 많은 탓익이도 하지만 그 만큼 우리가요에는 아름다운 노랫말, 아니 우리의 모국어 자체가 너무 아름답아든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밝고 울림 좋은 노래를 올렸는데 전회 <돌지 않는 풍차>로 부터 어느 새 우리네 삶의 신산(辛酸)한 편린, 서럽도록 아름다운 꿈과 미련에 이르고 있는데 그 또한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이라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가사 1절을 올립니다.
잊혀진 계절 / 박건호 작사, 이범희 작곡, 노래 이용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뜻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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