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의 마초할배는 마침내 <YTN24> 하루를 마감하는 뉴스가 끝난 뒤에도 한참이나 온갖 잡념과 걱정에 시달리다 간신히 잠이 들었다가 위잉, 청도운문산을 넘어온 북서풍이 오른쪽 대밭꼭대기에서 달리고 소리치고 울부짖는 고함소리에 잠이 깨기가 일쑤인데 순간 쨍그랑 화단에서 옹기나 주물(鑄物)로 만든 두꺼운 화분(그것도 아내가 특별히 아끼는)이 강풍에 데구르르 굴러가다 퍽, 박살이 나는 소리가 나 한참 숨을 죽이면 이번엔 정남쪽 100년 쯤 되는 소나무와 감나무의 키 큰 숲에서 우우, 우루우우, 북극해의 흰 수염고래가 가장 낮은 음파로 남대평양에서 적도까지 신호들 보내듯 거대한 코끼리가 창공에 대고 포효(咆哮)하듯 한참이나 웅얼거리다 잦아지면 콩콩, 단잠이 깬 마초가 언 달을 보고 한참이나 짖다 잠이 듭니다.
'어서 잠들어야지, 한숨이라도 더 포근하게 잠들어야 내 컨디션이 좋아지고 하루라도 더 살 텐데, 잠이, 잠이 어서 들어야지...'
하고 의식하면 의식할수록 정신은 더 말똥말똥해집니다. 초로의 할머니들이 다 그렇듯 하룻밤에도 몇 번이나 잠이 깨는 아내가 식탁의 불을 마시고 화장실에 갔다, 한참 새끈거리고 잠이 들다 다시 잠이 깨는 걸 모르는 척 애써 숨소리를 죽여도 여전히 오지 않는 잠, 휴대폰을 켜 벌써 새벽 두시에 접어드는 걸 보고 오늘은 차라리 잠들기를 포기하고 저 끝없이 불어오는 바람에 대해 한 번 생각해보기로 했습니다.
정년퇴직을 하고 한창 해외여행을 맛들일 무렵 우리 가족 보다 한 10여 년 전부터 해외여행을 즐겨 이젠 크루즈로 남미의 에콰도르 같은 호화관광을 즐기는 지인으로 부터 모임자리에서
“우리나라가 통신, 전자, 자동차와 선박, 하다 못해 에니매이션이나 컵라면 초코파이까지 다 세계를 제패했다지만 우리가 흔히 흥얼거리는 한국가요가 세계인이 모두 모이는 유명관광지에서 시도 때도 없이 불리다니 말입이다.”
하면서 페루소재 잉카문명 마지막보루인 마추픽추나 나스카의 유적지에서 경비행기나 탈 것을 기다릴 때마다 한 두 번씩 꼭 김범용의 <바람 바람 바람>을 틀어주는 것이 신기하다 이제 그 <바람 바람 바람>음악이 들리지 않으면 왠지 섭섭한데 신기한 건 어느 듯 그런 한국음악에 길들여진 남미 원주민과 혼혈인 히스패닉은 물론 아프리카의 케냐냐 북구라파 스웨덴사람도 <바람 바람 바람> 무료히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문득 <바람 바람 바람>이 나오면 한순간에 모두의 얼굴이 밝아지고 발을 까딱거린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 <바람 바람 바람>이 세계적으로 한류 또는 케이 팝을 일으키기 이전 여자그룹 소녀시대나 박진영과 정지훈(비) 또 <사이>가 <강남스타일> 들고 보르드웨이의 극장가나 캘리포니아의 야구장을 환희로 물들이기 이전 가장 원초적인 <한류>의 형태로 파고 든 것입니다. 물론 저도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 옆에서 관광선을 타기 직전, 또 그랜드캐넌의 경비행장에서 그 <바람 바람 바람>을 들었고 말만 유럽이지 무슬림에 물든 메마른 땅, 연 강우 200mm 안팎의 스페인의 그 거친 땅과 올리브 밭을 횡단하며 듣기도 했는데 가장 놀라운 건 유럽대륙의 끝 지브롤터 해협의 어느 작은 항구에서 아프리카의 관문 모르코의 탕헤르로 향하는 뱃머리에서 그<바람 바람 바람>을 들은 일은 마치 파리의 광장에서 전 유럽의 우리 동포들과 어울려 2002남아공월드컵 8강 진출, 우루과이전을 응원하던 일처럼 아주 특별한 경험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 국민은 물론 전 셰계인이 늘 흥얼거리며 따라 부르는 그 <바람 바람 바람>의 가사(김범용 작사 작곡 노래)를 보면
1.
문 밖에는 귀뚜라미 울고
산새들 지저귀는데
내 님은 오시지는 않고
어둠만이 짙어가네
저 멀리엔 기타소리
귓가에 들려오는데
언제 님은 오시려나
바람만 휭하니 부네
내 님은 바람이련가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
오늘도 잠 못 이루고
어둠속에 잠기네
그대 이름은
바람 바람 바람
왔다가 사라지는 바람
그대 이름은 바람 바람 바람
날 울려놓고 가는 바람
2.
창가에 우두커니 앉아
어두운 창밖바라 보면
힘없는 내 손잡아 주며
님은 곧 오실것 같아
저 멀리엔 교회 종소리
귓가에 들려오는데
언제 님은 오시려나
바람만 휭하니 부네
내 님은 바람이련가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
오늘도 잠못 이루고
어둠속에 잠기네
그대 이름은 바람 바람 바람
왔다가 사라지는 바람
그대 이름은 바람 바람 바람
날 울려놓고 가는 바람
날 울려놓고 가는 바람
날 울려놓고 가는 바람
의 매우 단순하고 손쉬운 가사입니다. 굳이 특징을 찾으라면 매우 빠른 템포에 경쾌한 리듬 그리고 가벼운 애수를 띤 김법용의 비음을 들 수 있고요.
문단에 등단에 시인이란 이름으로 살아온 지 근 30년, 저는 늘 시와 노래가사, 시인과 가수에 대해 비교해보는데 가면 갈수록 시와 시인이 열세인 것 같습니다. 제가 앞으로 바람에 관한 매우 진중하고 무거운 주제의 글도 몇 편 더 쓸 작정이면서 굳이 이 지극히 가벼운 김범용의 노래를 가장 먼저 올리는 것은 한국의 한 젊은이가 지나가는 바람으로 받은 우연한 영감하나로 만들어낸 이 세계적인 흥겨움, 한국인이 가진 또 하나의 자랑거리, 가벼운 한국인의 정서를 멋진 세계적 정취(情趣)로 만들어준 창작 혼에 대한 찬탄을 표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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