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일흔 한 살의 동화(童話)」 (68)찍자, 찍자할 때 그만...

말년일기 제1269호(2021.3.9)

이득수 승인 2021.03.08 15:07 | 최종 수정 2021.03.10 20:27 의견 0

우리가 농촌에서 자랄 때 마을에 나이든 영감이 죽어서 초상을 치른 뒤 며칠이 지나면 아낙네들이 모이는 우물가의 빨래터나 사내들의 사랑방, 심지어 소먹이는 아이들까지 괜히

“맞아, 박자, 박자 할 때 박을 일이지, 무단히 안 박다가 그렇게 종을 치고 말다니...”

잘못 들으면 아주 외설(猥褻)스런 욕 같은 농담이지만 사실은 가족사진을 못 찍었다는 이야깁니다. 그러니까 지난 명절 모처럼 아들딸에 사위, 며느리에 손자들까지 20명도 넘은 대 가족이 모였을 때 살림이 넉넉한 맏사위가 읍내의 사진사를 불러 모처럼 가족사진을 찍자는 것을 무단히 생돈을 쓴다고 장모되는 이가 거부를 해 허사(虛事)가 되었는데 그러고 몇 달 안 되어 영감이 죽어 영정사진마저 한 장이 없어 할멈이 울면서 후회를 했다는 겁니다.

이 우스꽝스런 사건 말고도 전회에 올린 김미성의 <아쉬움>에 나오는 일처럼 우리 주변에는 설마 나중에 하면 되지 하고 슬슬 뒤로 미루다 문득 기회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꽤 흔한 편인데 오늘은 좀 멋쩍기는 하지만 제 주변의 많이 배운 중산층에서 시골의 농사꾼처럼 설마, 설마 미루다 그만 거대한 눈물바탕이 된 이야기를 하나 해보겠습니다.

연산로터리에 조그만 가게를 열고 여기저기 거래처를 뛰며 알뜰히 돈을 모아 아들딸 공부를 시키고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 제 또래 해병대출신이 한 사람 있어 그 친구가 되는 제 친구와 어울려 같이 식사도 하고 술도 마시며 한두 시간 큰소리 탕탕 치기 좋아하는 사내들의 여전한 해병정신을 경청하는 것도 별로 싫지 않았습니다. 거기다 제 아내가 그 댁 부인과 계원이고 두 집의 아들도 고등학교동창친구라 안팎으로 잘 통하는 사이인데 어느 날 저녁 문득 아무개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한참이나 눈물을 흘리던 아내가 곧장 장례식장으로 향했습니다. 

아무리 지독한 슬픔도 세월 앞에서는 안개처럼 시나브로 흩어지고 마는 법, 남편과 사별한 지 5년도 더 지난 검사엄마가 제두도로 놀러가서 회원들과 무슨 이야기 끝에 하면서 슬그머니 이야기를 꺼내면서 눈물을 주르르 흘리는데
 
남편이 세상을 떠나던 그날 모처럼 고향친구들의 모임이 부산 산성마을의 오리구이 집에서 열려 오지랖이 넓은 남편이 아침 일찍 길을 나서는데 문득 아주 짧고 불안한 예감이 들어 아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여보,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 오고 갈 때 자동차 조심하고.” 하자
“아, 알았어.” 하고 돌아서던 남편이 문득 뒤돌아서면서
“이 봐, 한 번 됐나?”

가슴을 쫙 펴는 것이었습니다. 아내가 폐경이 되고 남편이 아내를 찾지 않은 지가 벌써 몇 년째가 되는 환갑 직전의 나이라

“사람이 평소 안 하던 짓을 하면 죽는다는데 이 양반이 무슨 일이야? 그래 우쨌든동 무사히 잘 다녀오기만 하면 내 오후에 모처럼 목욕이나 한 번 갔다 오든지.” 하고 남편이 떠나보냈는데 그게 부부의 마지막 만남이었습니다.

 사진1. 해병대전우회의 봉사모습이미지 사진2. 중년사내들의 족구하는 모습 이미지
 족구하는 중년들

모처럼의 모임에 붙임성 좋은 남편이 자신이 많이 먹기도 했지만 이 친구 저 친구들에게 부지런히 술을 권해 분위기를 살리다 점심이 끝나고 커피를 마신 뒤 모두들 평소처럼 고스톱이나 치려고 조를 짜고 둘러앉는데

“늙어서 노름하면 장갱이(무릎) 절딴난다. 우리 오늘은 이 공기 좋은 데서 모처럼 족구하 한번 하자.”

친구들을 설득해 건강이 괜찮은 이들만 네 명씩 편을 짜고

“자, 간다. 받아라!”

첫 번째 서브를 넣던 그가 갑자기

“아...!”

소리와 함께 풀썩 쓰려졌는데 친구들이 고개를 들어보니 코피를 한 줄 흘리면서 그만 숨을 거두고 만 것이었습니다.

그의 장례식에서는 몇 년째 사법고시를 공부하며 아직 2차 시험이 안 걸려 애를 먹던 아들이 아버지가 자신이 자꾸 시험에 떨어져 스트레스를 받아 죽었다고 너무나 슬퍼했는데 그 후에 얼마나 분발했는지 아들은 보기 좋게 사범시험에 합격 지금은 유능한 검사가 되어있습니다.

여러분, 부부 간이나 부모나 자녀들 또 가까운 친구나 친지들 사이에 밥을 함께 먹거나 가벼운 여행을 떠나려다 무심히 다음 기회로 미루다 이 처럼 못다 한 꿈이 된 적은 없습니까? 저 먼 황야를 가로질러간 기차는 다시 돌아올지 모르지만 시간의 간이역(簡易驛)을 지나간 기회나 만남은 좀체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 수많은 관계와 사람들 중에서 오늘은 또 한 번의 모처럼의 기회

“사랑한다. 고맙다.”

라는 진심의 표현을 절대로 미루지 말기 바랍니다.

平理 이득수 시인
平理 이득수 시인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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