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일흔 한 살의 동화(童話)」 (71) 이 시점에 다시 무얼(면도기)

말년일기 제1272호(2021.3.12)

이득수 승인 2021.03.11 16:13 | 최종 수정 2021.03.13 18:13 의견 0
사위가 사준 새 면도기

사진에 보이는 면도기가 얼마 전 새로 산 면도기입니다. 나름대로 최신식으로 디자인을 했겠지만 어찌 보면 외계인 E.T의 머리 같기도 하지만 저는 어릴 적에 직접 본 실물의 형상 중에서 가장 징그러운 모습, 첫째는 우리 몸에 기생해 산다는 엄청 크고 긴 몸체에 육식곤충 사마귀 같은 삼각형의 머리를 가진 촌충(寸蟲)의 이미지고 또 하나는 꽃집에서 가끔 볼수 있는 키가 큰 서양화초 <아마릴리스>의 모습입니다.

저는 체질적으로 턱수염이 많거나 짙은 사람이 아니라 한창 젊은 시절도 크게 면도할 것이 없어 직장에 무슨 행사가 없으면 한 이틀 면도를 안 해도 크게 표시가 안 나 참으로 편리한 젊음을 건너왔습니다. 제 아버님도 사정이 저와 비슷해 말년의 7, 8년을 직접 간병하며 임종까지 한 저도 아버지가 면도하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고 제 아들놈(정석)도 저보다 턱수염이 더 드물어 어쩌다 한 번씩 면도라고 하는 것을 보면 비누거품을 칠하는 적도 거의 없이 그야말로 건성으로 대충대충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집안에 시집온 여인들, 어머니와 아내와 제 며느리는 방금 얼굴가득 비누칠을 하고 꼼꼼하게 면도를 해서 귀 밑에서 턱으로 흐르는 선에서 조금은 끈적이는 듯 향긋한 사내의 냄새 새파랗고 싱싱한 면도자국을 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 늙어, 아니 병이 짙어 몸을 움직이기가 많이 불편하고 부자유스러우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어쩌다 병원이나 마트, 언양읍의 시장이나 식당에 갈 때, 아직도 영감의 깔끔한 모습에 몹시 집착하는 아내가 그리 진하지도 못 하고 사내답지도 못 한 노랗게 퇴색한 몇 올의 수염이 턱에서 귓가로 흩어진 것을 보고  

“아이구, 영감. 그 많은 시간에 면도나 좀 하시지?”

탄식을 하는게 싫어서 일주일에 두세번 면도를 하는데 시원하고 깔끔하기는 목욕탕에서 500원에 판매하는 일회용의 면도기가 구조도 단순하고 비누칠을 해서 긁어대면 몇 안 되는 퇴색된 수염들이 마치 오래 끌어 지친 전장의 패잔병(敗殘兵)처럼 너무나 순순히 항복을 해 밥 잘먹고 마초에게 괜히 눈을 흘기듯 참으로 쉽게 상황이 종료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에 와서는 앉고 일어서기와 화장실에 가는 일까지 다 힘들고 귀찮은 판에 점심 한 끼를 먹으러 나가기 위해 억지로 면도를 하기보다는 차라리 전기면도기가 하나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 침대에 앉아서 거울마저 볼 필요도 없는 듬성듬성한 면도를 마치고 아내를 따라 <천손짜장>의 면발에 기대를 만발할 것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면도를 하느니 마느니 할 때마다 아내의 심기가 편하지 못 합니다. 그건 제 아들이 한 5년 전에 갑자기 병이 든 아비를 위해 브라운이라는 최고급의 면도기를 통신으로 구매 잘 써왔는데 이 <덩덕군이> 영감이 어이도 없이 그만 날려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연이 더욱 아내의 심기에 불을 지피는 것이 작년 3월인가 제 포토 에세이집 출판을 위해 <인타임>이라는 출판사를 운영하는 전 국제신문 조송현 논설위원(전부터 안면이 있었음)이 방문한다고 해서 아내가

“영감, 오늘은 그 창문 좀 활짝 열어놓고 책상이고 책꽂이의 지저분한 물건을 좀 정리하세요.”

면도하는 남자 [픽사베이]
면도하는 남자 [픽사베이]

하는 바람에 오전 11시에 방문하기로 약속한 그가 올 때까지 아침 여섯 시부터 서재의 창문을 열어놓은 데다 빈 라면 박스를 하나 가져와 여기저기 흩어진 지로통지서와 카드명세서에 바쁘고 성가셔서 미처 봉투를 뜯어보지도 못한 간행물까지 박스에 집어넣어 다음날인 수요일 밤 재활용 스레기배출에 맞추어 실어 보냈든데 며칠 뒤 면도를 좀 하려고 충전하려니 평소 의자에 앉아 오른 손을 뻗기만 하면 닿는 서가의 책장 앞에 놓여 있덩 면도기의 충전기와 코드가 사라진 것이지요. 평소에 자잘한 일을 잘 챙기지도 않는데다 귀한 손님이 온다고 과감히 정리한다고 하는 것이 그만 생필품 면도기를 못 쓰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다음 재활용쓰레기를 버리는 날

“에잇 코드도 없는 면도기라니...”

하고 면도기도 재활용으로 보내고 손을 탈탈 털며 다시 500원짜리 면도기를 사용하니

“아니 당신 면도기는 어쨌어요?”

해서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아내의 얼굴에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설령 충전코드가 없으면 본사에 신청을 해 간단히 다시 사용할 수 있는 것을 그대로 버렸으니 이렇게 앙금없는 영감하고 평생을 산 자신이 불쌍하다고 한심하다는 것이었지요.

지난 가을 암세포는 둘째로 살아있는 정상세포까지 싸잡아 공격해 버리는 지독히도 비싼 항암약을 먹고 온몸은 물론 잇몸까지 무너져 이제 세상만사가 귀찮아져 눈도 잘 안 뜨고 누웠다가 그래도 몇 달 만에 병원에 가니 면도를 하라는 아내의 말에 

'아아, 이럴 때 면도기가 있어야 되는 데 이미 내손으로 버렸으니...' 

장탄식을 하고 목욕탕에서 거울을 보며 힘들게 면도를 하여야 했습니다.

 설날을 며칠 앞두고 착한 우리 딸 슬비와 사위 도연씨가 전화로 

“아버지 불편한 것 또는 꼭 필요한 것 없으세요?”
“없다.”
“어머니는?”
“없어요.”

이 어려운 시기에 아이들 돈이 들까 무조건 다 좋다고 하고 말았는데 설날에 아이들이 같이 모여 점심을 먹으면서

“아빠, 면도 좀 하시지, 수염도 몇 올 없으면서...”

탄식을 하자 자연히 전에 면도기가 없어진 이야기가 나오고 말았습니다. 밥숟갈을 놓기 바쁘게 사위가 전화로 통신판매를 알아보는데 아내가 괜한 돈을 쓰게 한다고 또 제게 눈총을 쏘아 저는 짐짓 모르는 척 침대에 누워 담요를 뒤집어섰습니다.

이튿날 바로 배달된 면도기로 요즘은 아주 편안한 문화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 나에게 또 그 비싼 면도기라니?”

사실 이 면도기를 얼마나 쓸지 혹여 2, 3년 사용해서 중고품이 될 때까지 제가 살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몸이 이 지경이 되어 내일을 기약하기도 힘든데 무려 25만 원이나 하는 고급면도기를 산다는 것은 참으로 무모한 일이기도 하지만 저로서는 그래도 고마운 일이고 행복한 일일 뿐입니다. 참으로 착하고 귀한 내자식들, 오늘은 특별히 사위가 귀해 보이는 날입니다. 

平理 이득수 시인
平理 이득수 시인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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