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일흔 한 살의 동화(童話)」 (75) 끼니 한 번 넘기기가...

말년일기 제1276호(2021.3.16)

이득수 승인 2021.03.15 19:03 | 최종 수정 2021.03.19 10:39 의견 0

먹을 게 귀하던 시절은 당장 배고 고픈가, 안 고픈가, 먹을 것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생명이 보장되었고 그래서 가장 큰 곰이나 순록을 잡은 사냥꾼이 바위동굴에 칩거하는 모계사회의 1등 신랑, 가장 실하고 아름다운 여인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처럼 풍요한 시절에는 먹느냐 못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보다 맛있게 또 아름답고 품격 높은 식탁을 차리느냐, 또는 허겁지겁 빨리 먹어치우느냐의 <먹방>이 대유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풍요속의 빈곤>이라는 말이 있듯 이 미식(美食)과 식도락의 이면인 도시의 뒷골목에는 부실한 컵라면이나 과자부스러기로 배를 채우거나 그도 감당을 못 해 곳곳의 무료급식소를 찾는 사람이 많은데 아직 젊고 멀쩡한데다 번듯한 정장을 입은 사내, 지나칠 정도로 화장을 해 천박한 느낌의 여성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공평하지 못한 것은 이 풍족한 시대를 가장 열심히 살아 날마다 산해진미(山海珍味), 진수성찬을 먹고도 남을 형편이지만 몸이 속병이 있거나 이빨과 잇몸이 무너져 제대로 씹지 못하고 목이 아파 제대로 삼키지 못 하는 사람도 있으니 이 얼마나 지독한 형벌입니까? 저승에는 여러 형태의 지옥이 있어 평소 죄 많은 인간을 응징한다는데 아직 살아서도 뭘 잘 못먹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이야 말로 바로 생지옥인 것입니다.

6.25 동란중의 농촌에 태어나 흙바닥의 닭똥을 주어먹고 자라도 아무 탈 없이 잘만 자란 세대, 먹을 것이 있으면 일단 무엇이든지 먹고 보자는 바람에 늘 굶주리는 위장을 사정없이 폭식(暴食)에 빠뜨려 배가 앞산처럼 불러오며 짜구(위확산증)가 난 경험이 있는 우리 또래 시골아이들은 사춘기가 되어 라면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문득 배고픔을 잊어버리고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되는 값싼 빵과 음료수 등 그야말로 먹을 복이 폭발해 한 30대가 되면서는 삼겹살과 로스구이, 통닭과 생선회와 자장면이 일상화 되면서 옛날 아주 검소한 임금, 가뭄이 길어지면 반찬수를 줄여 감선(減膳)을 하던 세종대왕이나 영조임금보다 더 풍성한 식탁의 주인공이 되더니 반만년 가난의 나라에서 난데없는 비만과 당뇨, 고혈압 같은 성인병과 암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말하자면 너무 과속으로 발전하는 사회와 늘어나는 먹거리에 얼이 빠져 심신을 망친 경우인데 불행히도 뭘 좀 안다는 마초할배도 그 단순무식한 병을 벗어나지 못한 당뇨와 암환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사진1. 한 끼 한 끼 간신히 넘기는 식탁
 한 끼 한 끼 간신히 넘기는 식탁

그 동안 그 지긋지긋한 항암전선에 나서지 6년차, 이제 더는 방법이 없이 금방 죽을 것이라 해도 우리 세째 누님이 

“동생 니는 엄마가 점을 보고 밍(命)이 길어 오래 살거라 캤다. 암만 누가 뭐라 캐도 지 밍 놔두고는 안 죽는다.”

하는 말처럼 일단 죽지는 않고 꾸역꾸역 살아왔습니다. 암세포가 번져 여기저기 통증이 나타나고 앉거나 눕는데 불편이 생겨 이상한 자세로 잠이 들어도 얼마 견디지 못 하는 점이 가장 힘들지만 그 보다 이제 내가 어느 순간에 어떻게 금방 죽어갈지 모른다는 생각에 시도 때도 없이 불안에 떨어야 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일대 파국이 오고 말았는데 그건 지난 가을 이제 아무리 많은 돈을 주어도 더는 주사나 약물이 없어 마지막 신종약품을 먹었는데 담당의사의 우려대로 약물이 암세포가 아닌 정상세포를 마구 공격해 손발의 끝이 짓무르고 관절에 힘이 빠져 일어나기가 힘들고 식욕이 없어 뭘 먹지 못하고 온갖 잡념과 악몽에 잠을 이루지 못 하고 식은땀을 흘리다 실신지경에 빠지는 것이었습니다.

먹지 좋게 밥도 좀 질게 하고 제가 좋아하는 갈치도 굽고 김치도 푹 익은 신 김치로 상을 차리고 어디서 그 귀한 옥돔까지 구해와도 

“미안해. 담에 많이 먹을 게.”

채 열 술을 뜨지 못 하고 식은땀을 흘리며 물러나는 제가 미안해 죽을 판에 아내는 얼마나 또 맘이 아팠겠습니까?

그래서 일단 약을 끊고 침대를 하나 사서 앉고 일어서고 눕기를 편하게 하고 겨울 볕이 환하게 방바닥을 비추는 거실과 서재를 몇 바퀴씩 돌고 아내가 끓인 죽으로 억지로 점심을 때우고 마초와 둘이 아주 천천히 칼치못이나 사광리까지 한 500m, 600m를 걷고 한 두세 시간을 늘어져 자면서도 하루 두세 번 읽고 쓰기를 중단하지 않자 차차 산책시간이 길어지고 밥숟갈이 늘어나 요즘은 살이 조금 올라 세수를 하면 양 볼과 이마에 부드러운 느낌이 돌아오니 한층 살맛이 나는 것입니다.

사진2. 꿈에도 그리는 음식 마른 오징어 이미지
꿈에도 그리는 음식, 마른 오징어

사람이 묘한 것은 속이 아프고 잇몸이 안 좋아 식욕이 없다고 음식에 대한 열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하루의 대부분을 누워 지내다 어떤 땐 곶감이 먹고 싶어 하나를 먹고 나면 한나절 쯤 소화가 안 되어 고생을 하고 딸이나 아들이 택배로 보내주는 일등급쇠고기 등심이나 안심도 한 댓 점 먹으면 더는 못 먹고 밤새 그걸 소화시키느라 고생을 하는데 연산동의 형님 한 분은 어쩌다 만나면 고맙게도 꼭 쇠고기를 사주고 많이 먹으라고 권해 식사를 마치고 자동차로 언양에 도착할 때까지 조용히 눈을 감고 소화에 전력을 다 하는데 저 같은 경우는 지금 무엇보다 먹는 일, 소화시키는 일이 가장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 아내와 같은 성당의 아네스자매님이 청국장을 나눠주어 정말로 쉽게 한 반 그릇쯤의 밥을 비우고 봄이 오면서 누님이 달래를 뜯어와 달래된장과 달래간장의 상큼한 맛에 조금씩 입맛이 부활(復活)하고 있습니다. 한 끼 한 끼를  때우는 일이 너무나 힘들지만 언젠가 고두밥 한 그릇은 물론 자연산 생선회에 매운탕도 먹고 잇몸이 되 살아나 오징어나 한치를 구워먹는 꿈을 꾸기도 합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먹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어 그 자체로 아직 행복한 것입니다.

삼시세끼 차리느라 고생하는 아내에게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平理 이득수 시인
平理 이득수 시인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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