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일흔 한 살의 동화(童話)」 (79)외로움으로, 그리움으로
말년일기 제1280호(2021.3.20)
이득수
승인
2021.03.19 18:08 | 최종 수정 2021.03.20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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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높은 산은 아니더라도 펑퍼짐한 뒷동산의 숲속에 앉아 무심히 하늘을 우러른 적이 있나요? 아무 목적이나 욕심 없이 옷을 버려도 그만이라고 숲속에 퍼질러 앉는다면 금방 풀잎과 나뭇잎의 향기, 낙엽의 바스락거림 같은 자연의 리듬에 젖어 문득 자신의 숨소리나 맥박이 커다랗게 들려오면서 소나무나 잡목림의 가지사이로 한층 푸르른 하늘을 편안하게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소 먹이던 시골소년 적에도 그랬지만 대학과 군대, 결혼 전의 방황하던 젊은 시절 나는 유난히 자주 숲을 찾았습니다. 그렇게 한참동안 아주 오래전에 본 풍경과 영화 속의 이야기를 떠올리다 머리 위의 오리나무를 쳐다보면 문득 그 타원형의 동그만 열매들이 참으로 외로워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솔가지에 다닥다닥 붙은 솔방울들이 왠지 누군가를 기다리는, 무엇인가를 그리워한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도 오리나무열매를 외로움으로, 솔방울을 그리움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꽤 나이가 들어 왜 오리나무열매와 솔방울이 외로움과 그리움으로 비치는 것인지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야산에 오르는 것은 주로 늦가을과 봄 사이, 잎이 떨어진 나무나 낙엽이 뒹구는 그루터기에서 쓸쓸함이 묻어나는 계절이었고 나는 어쩌면 나뭇가지에 부딪히며 윙윙대는 찬바람의 음울함을 좋아했는지도 모릅니다. 마치 바람이 점령군처럼 나를 몰아세우면 나는 패잔병으로 숨어 겨울을 난다는 그런 애잔한 감상(感傷)을 즐겼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솔방울이나 오리나무 열매가 거의 다 떨어진 봄의 입구인 2월쯤에는 못 견디게 더 외로움과 그리움을 느꼈던 것이겠지요.
그러나 또 한편으로 대부분 객지인 대도시에서 정신없이 부대끼는 현대의 도시인으로서는 누구나 일용의 양식처럼 가난하다, 피곤하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며, 힘들게 주어진 휴식 뒤에는 왠지 혼자라는 외로움이 엄습하고 그렇게 상념에 빠지다보면 유년과 어머니의 그리움에 매몰되는 것이니... 결국 황석영이 <삼포가는 길>에서 삶이란 노을빛 같다는 말처럼 우리네 생애 역시 외로움과 그리움을 일용하다 안타까움이라는 부스러기로 사라져가는 그런 여정이 아닐지...
그러나 이제 곧 봄바람이 불면 오리나무열매가 떨어진 자리마다 면류관(冕旒冠)처럼 화려한 연두 빛 꽃술이 드리워지고 소나무의 초록빛 새순 위로 산새들이 포릉포릉 날 것입니다. 그 때에는 우리도 산을 내려와 일상에 묻혀야지요.
그러나 다시 겨울이 오면, 봄빛이 어릴 때쯤이면 우리는 또다시 혼자 숲속에 앉아 외로움과 그리움을 키워야 할지도 모릅니다. 모두가 가난하고 피로한 이 시대에 우리에게 외로움과 그리움을 마음껏 키울 수 있는 넉넉한 가슴과 무한대의 자유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행복입니까?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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