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일흔 한 살의 동화(童話)」 (82) 내 평생의 고집과 후회 ③생활 없는 생활력

말년일기 제1283호(2021.3.23)

이득수 승인 2021.03.20 14:17 | 최종 수정 2021.03.24 21:03 의견 0
고속도로 휴게소 음반가게 [유튜브 별별사랑]

고속도로휴게소에서 쉬어갈 경우 저는 언제나 유심히 살피는 것이 오늘은  손수레테이프장수에게 몇 명이나 손님이 둘러싸고 요즘 무슨 음악이 유행인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럼 화장실에 들렀던 아내가 반색을 하며 

“와? 카세트테이프 하나 사줄라꼬?”

기대만발을 하지만

“특별히 들을 만 한 것이 없네.”
하고 자리를 뜨려면

“영감, 그건 음악이 좋아 사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분위기 좋을 때 일단 하나 사놓고 듣다보면 음악이 귀에 익지.” 해서 큰맘 먹고 한번 사준 일이 있는데 그게 하필이면 <이박사의 노래모음>으로 멀쩡한 중년이 어린아이의 가성(假聲)으로 동요와 유행가를 부르는 것이라 별재미를 보지 못했습니다.
 
또 저는 고속도로휴게소에 닿을 때마다 누가 기다리거나 하는 것처럼 봉고화물차의 만물상에 가서 엄청 심각한 표정으로 이것저것을 뒤져 마치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듯 새로 나온 기구하나를 손에 잡고 눈을 빛내면, 물건 보는 눈이 보통이 아니라고, 그렇게 신제품의 효능을 알고 실생활에 응용하는 분이야말로 시대를 앞서가는 생활인이라고 장사꾼이 추켜세우면 여간 비싼 물건이라도 지갑 깊숙이 비상금을 꺼내서라도 기어이 사고 마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 주변에도 그런 사람이 하나 있어 저는 헛돈을 쓴다고 자주 혀를 차는데 물론 새로 나온 기계나 공구의 성능이 뛰어나긴 하지만 일반 가정에서는 어쩌다 한 번 쓰면 3,4년을 넘어 몇 십 년 쓸 일이 없는 공구라도 그 아이디어가 기발하다고 서슴없이 구입해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고 마루 밑에 수북이 쌓인 집은 저축이 많거나 새집을 사 이사를 가는 경우가 거의 없이 늘 쪼들리는 편입니다. 살림살이라는 것이 신기하다고 물건을 사고 새로 나왔다고 그냥 한번 사보는 소꿉놀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스스로도 조심을 하지만 세상살이에 한참 뒤져 멀리 하는 사람이 무심코 유원지에 가거나 시장이나 백화점에 따라가면 기어이 무엇인가 하나 사서 쇼핑백을 옆에 끼고 나오는 충동구매와 고속도로휴게소의 단골손님들입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인생이 재미로 또 단순히 신기하다는 이유로 생활비를 투자할 만큼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그 재미없는 남편인 저는 그런 자잘한 생활의 재미는 모르지만 대신 생활력하나는 최강입니다. 제가 명예퇴직을 하던 날 아내는 설마설마 했지만 무려 40년 동안 하루아침도 빠지지 않고, 설령 술이 떡이 되어 눈을 못 뜰 지경이 되어도 단 한 번도 출근을 포기한 적이 없는 남편, 그래서 일시적으로 살림이 쪼들리거나 좌천을 당하고 승진에서 탈락되어도 단 한 번도 절망하지 않고 반드시 다시 일어나 달릴 것이라고 믿은 것이 이렇게 성대한 퇴임식을 가져 꽃에 둘러싸인 귀부인이 되게 해 주었다고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사실 생활수준, 문화수준이 조금씩 향상된 지금시대라면 저처럼 그저 한눈 한번 안 팔고 묵묵히 일만하면서 휴식이라야 주말에 친구랑 소주를 마시고 고스톱을 치면서 넘어가는 사람, 그렇게 비정서적이고 비문화적인 사람, 생활의 여유와 아름다움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서정시집을 연속으로 내며  첨단의 아이디어를 창출하는 기획 맨이 되었는지 다들 믿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만 저로서는 우선 기본 생활이 가난하고 그래서 무엇이든 최선을 다해 일 할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니 술도 친구도 고스톱도 시와 문학도 내가 피해갈 수 없는 생활의 하나로 그냥 몰두했을 뿐인 것입니다.

This file was added by User Joymaster Ten plik został dodany przez Wikipedystę Joymaster Joymastere-mail GG 6403904COMMONS pl.wikiJoymasters upload list,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지금 와서 생각하면 단 한번 뿐인 인생을 너무 일만 하고 살았다는 후회가 되지만 그래도 제자신의 그런 일중독으로 맨주먹의 내 자식들, 그 착한 남매가 어엿한 사회인이 된 것 아니겠습니까?

2003년 추석때 초강력태풍 매미가 송도해수욕장을 상전벽해(桑田碧海)로 치고 나갔을 때 기획실장인 저는 시도 때도 없이 밀려오는 중앙의 나리들에게 보고할 브리핑자료 때문에 집에 가거나 양말을 갈아 신을 틈도 없이 고생하면서 무투표당성의 오만함에 냉혹함을 더한 사악함의 극치 민선구청장에게 말로는 표현을 못 할 모욕을 수 개월간이나 핍박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그 사이 단 한번 속옷과 양말을 바꾸러 집에 갔는데 남편을 본지 오래되는 아내가 변변찮은 식사 후 잠이 들어 저는 아내를 깨우지 않고 베란다에서 담배 한대를 피우고 집의 물맛(상수도)를 한 번 본 뒤 또 한대의 담배를 피우고 황급히 비상상활실로 돌아간 일이 있습니다.

비록 자잘한 생활의 즐거움은 없지만 쇠가죽보다 더 질긴 생활력으로 버틴 한 평생, 가장 고통이 심하던 시절 이런 시를 쓴 일도 있습니다.
 
      두 개의 꽁초로 남은 사내 / 이득수

차가운 빌딩 숲의 달을 마시다 
슬그머니 새벽녘에 기어온 사내
베란다서 잠 못 들은 별을 헸었나?
진득한 술내 엉긴 댕그란 꽁초.  

간신히 세수하고 아침 거른 채
황급히 튀어나간 까칠한 사내
찬란한 여명(黎明) 빛은 보고 갔을까?  
베란다에 허물 벗은 두 번째 꽁초.
 
<시인, 소설가>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