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일흔 한 살의 동화(童話)」 (85) 5년 만에 취하다
말년일기 제1286호(2021.3.26)
이득수
승인
2021.03.25 17:19 | 최종 수정 2021.03.26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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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천천히 좀 봐주시기 바랍니다. 화면 정 중앙에 꽁지머리가 잘 어울리는 장한(壯漢)이 술잔을 들고 건배를 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제가 처음 암수술을 하고 아내가 버리라는 담금주를 5년간 창고에 보관하다 제가 5년을 생존하면 그 생존을 기념하면서 한 인간의 생존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확률10%로도 안 되는 모험 또는 만용에 도전한 것인데 어찌어찌 성공해 오늘 좋은 술친구가 온 김에 기념사마 개봉을 한 것입니다.
사실은 기념주를 마시는 저를 찍어야 하나 담금주가 하도 독해 단 한 모금 마시고 머리가 띵하고 오금이 저려 저 대신 술을 마시는 술꾼, 술꾼으로서 또 하나의 저에게 술잔을 들게 하고 그 게슴츠레한 눈빛을 찍고 있습니다.
우선 오늘의 모델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겠습니다. 6척 거구에 삶의 경륜이 잘 묻어나는 저이는 현재 제 포토 에세이를 연재하는 웹진 인저리타임과 도서출판 인타임의 대표이며 경남 진주 출신의 수재로서 물리학을 전공하고 국제신문에 입사해 꽤 오랜 기간 문화부 기자와 노조위원장 등을 역임하고 논설위원으로 퇴임한 전형적 언론인으로서 저와는 서구청 문화관광시절 저의 신간시집 소개로 약간의 친분이 있는 사이이지요. 제가 퇴직한 이후 통 소식을 몰랐는데 작년에 제 포토 에세이집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를 발간하는 과정에서 해후, 인문학과 문학에 대한 폭넓은 이해, 예술 또는 철학, 인간의 삶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와 천착이 같은 성향이라 말년의 좋은 지기(知己)가 되고 있습니다.
사실 간암이 온 몸에 전이되어 수술을 두 번이나 받은 상태에서 5년 생존율이 3%밖에 안 되는 불가능한 일을 어떻게든 제가 뚫고 나가 성공하면 그 생존 5년, 그러니까 보건복지부 통계적 완치를 기념하기 위해 가까운 지인을 불러 작은 건배의 자리를 마련하고자 했는데 올해 봄 코로나19가 극성을 부려 감히 입 밖에 내지도 못하고 있던 차에 마침 공자님 말씀처럼 '유붕(有朋)이 자원방래(自願訪來)', 술친구가 알아서 찾아오니(포토 에세이 축약판 논의)로 이런 뜻밖의 자리가 마련된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백하수오와 말굽버섯을 넣은 듯한 그 담금주(제가 귀촌한 2015년 세 명의 생질이 이미 담근 지 몇 년 되는 걸 들고 왔으니 길게는 7 ~ 8년이 될 것 같은) 노란 술이 너무 독해 저도 기념 삼아 소주잔에 1/8 정도 따라 입만 적셨는데 그만 다리에 힘이 빠지고 호흡이 가빠져 사진을 찍자마자 침대에 누우니 오랜만에 종아리에 뜨거운 기운이 빠져나가면서 온몸이 노근하게 가라앉아 금방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실로 5년 만에 술에 취한 것입니다. 낯 술에 취하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고 하는 데 다행히 바로 뻗는 바람에 다른 일은 없었고요.
시골밥상으로 저녁을 먹으면서 조 선생은 또 몇 잔인가 담금주를 마시며 기분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잘록하게 잘 생긴 병 채로 줄까 생각하다 평소 술 좋아하는 저 사람이 저 달짝지근한 술을 들며나며 마시다간 요즘 세상 참 귀한 인재(人材)하나 일찍 버릴까 보아 생수병에 1/4쯤 따라 차에 실어주었습니다. 저 술 말고도 몇 병이 더 있기는 하지만 빛깔과 향기가 그중 나아 올해 가을쯤 제 몸도 잘 버티고 국화꽃도 향기롭고 달도 밝은 날 <명촌별서 달빛 음악회>라도 한 번 하면 참석자 한 40, 50명은 능히 즐길 것 같아 다시 보관하기로 했습니다. 저 노란 행복의 액체와 저와 여러분이 공유하는 자리를 이끌어내면 좋겠습니다.
저는 아프기 전 몹시도 술을 즐겨 하루도 술을 안 마시는 날이 없어 제가 간암이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은 이제 곧 끝장이 나겠지만 다행히 살아남아도 매일 술이 먹고 싶은 알콜중독에 시달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을 깨고 저는 몸이 아픈 이후 술이 당긴다거나 술을 못마셔 공황상태가 오는 금단(禁斷)현상은 오지 않았습니다. 또 제 딸이 그 좋은 술을 끊은 아비가 딱해 따로 사다준 <무알콜맥주>도 한 두 캔 마셔보고는 흥미가 없어 끊었습니다. 또 1년에 한 두 번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초겨울에 생선회를 먹는데 애주가 막내누님과 딸과 아내가 먹어봐도 된다고 소주 한 반 컵을 부어주어 마셔도 아무 탈이 없습니다. 단지 그 뒷맛에 아련히 감겨드는 어떤 행복한 기억에 대한 실마리에 사로잡힐까봐 과감히 술잔을 엎어버리긴 하지만.
술로서 골병이 든 저지만 그래도 저는 비교적 행운이 많은 술꾼, 급성간암으로 즉사하지도 않았고 5년 넘게 더 살며 기나긴 대하소설을 쓰고 장편소설로 수상도 하고 포토 에세이를 써 책도 내었으니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아제 더는 약도 주사도 치료방법이 없다고 하니 사람들이 저를 보는 시각이 '아직도 안 죽은 사람'으로 느끼는 것을 감지할 때가 더러 있지만 저는 아직 죽을 생각이 없고 하루하루 포토 에세이와 대하소설에 열심히 매달릴 것입니다. 곧 설날이 올 텐데 이 팍팍한 겨울에 '설술'이라도 한 잔씩 자시고 푸근한 세월 보내시기 바랍니다(연초에 적어놓고 상재가 늦었음).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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