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일흔 한 살의 동화(童話)」 (84) 나는 누구이며 내 이웃은 누구인가?
말년일기 제1285호(2021.3.25)
이득수
승인
2021.03.24 18:23 | 최종 수정 2021.03.26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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몹시도 추운 날 혈압약을 타러가는 아내에게 제 변비약도 부탁하고 저 혼자 한참이나 잠이 들었다 깨어나면서
'이래선 안 되지. 내게 얼마나 시간이 남은 줄도 모르면서 이렇게 노닥거려서 된단 말인가?'
한참이나 생각에 잠겼다가 이젠 <아침마당>이 끝난 텔레비전도 끄고 또 멍하니 앉았다가 서재로 건너가 <신불산>의 교정도 한동안 보다가 내일치 포토 에세이도 써야 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 잡혀 거실바닥은 물론 침대의 발치에 까지 찾아온 그 안온한 겨울 햇빛도 마다하고 일어서는데 문득
“째깍, 째깍, 째깍.”
내 숨소리 같기도 하고 옆에서 잠든 아내의 뱃속에서 나는 것 같은 소리가 엄습해
“아, 그래. 벽시계. 우리 집에 백시계가 있었지.”
휴대폰을 사용하게 되면서 좀체 쳐다보지 않던 동그란 벽시계를 바라보는데
“안녕, 마초할아버지. 요즘 소화가 안 되어 고생이 많지요? 어떤 땐 내가 장마 때 홍수가 쏟아지는 것처럼 시원하게 뚫어주고도 싶은데.” 하며 환하게 웃는 것 같아
“그래 고마워. ”
하고 고개를 돌리는데 저 멀리 싱크대위에 걸린 수제 도마(우리 동서가 원목으로 만들어준) 저를 보며 빙긋 웃으며
“할배는 왜 라면을 끓일 때 파를 가위로 잘라 넣는지 몰라. 종일 심심해 죽을 지경인 내가 얼마나 할배의 손길을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비상(飛翔)하는 독수리와 같은 자세로 몸을 비비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미안해. 방안에 할머니가 있을 땐 나는 할머니 외에는 아무것도 쳐다보지도 않고 생각하지 않아. 할머니만 옆에 있으면 내가 필요한 일은 다 이루어지니까.”
하고 시선을 돌리려는데 옆에 걸린 고무장갑이
“난 할아버지가 가끔 설거지를 하면서도 단 한 번도 나를 찾지 않는 게 한심해. 한 집에 산지 3년이 넘었지만 나는 아직 주인할아버지의 손가락사이즈를 모르잖아?” 해서
'미안해...'
소리를 삼키며 얼버무리는데
“그건 아무것도 아냐. 난 말이야. 이렇게 동그랗고 무니도 예쁜 찻잔을 나를 두고 할아버지가 저 투박한 빨간 컵에 커피를 탈 때마다 마음이 상해. 너무나 야속한 할아버지.” 하는 순간
“그건 마찬가지야. 양이 많은 쌍화차를 끓일 때 할아버지는 절대로 나를 쓰지 않고 저 하얗고 큰 컵을 쓰잖아?”
항의가 끝이 없을 것 같아 이번엔 식탁을 돌아 아내의 기도실을 찾았는데 성모마리아와, 성가족3명, 촛대와 양초와 성물(聖物)이 그대로 조용히 자리 잡은 사이로 지난 번 제 침대를 들이며 자리를 잃은 마스크와 약병, 아내의 장바구니에 각종 약상자들이 무대뽀로 밀고 들어왔지만 성모마리아와 성가족은 조용히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민망해 제 서재로 돌아오자 공간이 좁아 얹어놓은 체온계와 컴퓨터보조장치(용량을 늘이는 것), 가끔 어지럽고 쥐가 날 때 먹는 아스피린과 간장약 우루사 등 자질구레한 물품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나는 참으로 많은 자질구레한 이웃에 싸여 또 그들에 의해 살아가는데 그 고마움을 모르고 매번 아내가 먼지를 닦게 하고 있습니다. 내 주변의 그 많은 소도구들, 나를 지탱해주는 그들을 위해 나도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글쎄요, 또 며칠인가 지나면 물걸레를 들고 들어오는 아내를 발견하게 되고 말겠지요.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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