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일흔 한 살의 동화(童話)」 (77)이득수의 봄에 띠우는 편지
말년일기 제1278호(2021.2.18)
이득수
승인
2021.03.17 23:03 | 최종 수정 2021.03.19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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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 전인 2009년 봄이었습니다. 그 전해에 공무원사회의 장성급이라는 서기관으로 진급해 서구청총무국장으로 근무 중인 저는 이제 아무런 애로사항도 없이 지나온 40년간 공직생활을 반추하며 퇴직시점을 가늠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해도 대한민국은 여전히 경제난과 취업난에 시달려 모든 행정기관에서는 단 한 푼의 예산이라도 <조기집행>해 시장바닥의 경기를 살려야 된다고 매일 중앙의 지시가 내려올 때입니다.
그래서 무려 40년 전의 저처럼 아직 공직생활에 익숙하지 못 해 힘들어하는 후배들을 위해 무엇인가 용기를 좀 심어주어야겠다는 생각에 매우 감성적이고 다정하며 희망에 넘치는 메시지 <봄에 부치는 편지>를 작성해 부산시청 스마트 플로우에 올렸는데 첫날 4천정도의 조회수가 두 번째는 5천에 육박하며 많은 동료들의 뜨거운 호응을 얻었고 1주일에 한 번씩 올리는 <편지>가 늦어지면 여기저기 옛 동료들로 부터 독촉이 빗발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봄이 이울도록 모두 7회의 <봄에 띄우는 편지>를 올리고 저는 그 해 5월에 퇴직을 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벌써 12년, 늙고 지친 제가 올 해봄 뭔가 나 자신도 힘을 얻고 이웃에게도 희망을 나누어줄 메시지를 보낼 게 없나 궁리하다 마침 그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당시 모두 7호까지 나갔는데 제 컴퓨터에는 1, 5, 6호 3개 메시지만 남아 차례로 올리고 머리가 맑은 날 <일흔한 살의 봄 편지>도 몇 편 띄워볼까 생각합니다. 일독을 기대합니다.
이득수의 봄에 띄우는 편지2
엘레지, 봄의 발소리
영남의 소금강이라고 불리는 천성산에서 혼자 하산하던 길이었습니다.
811m 제2봉정상에서 집북재와 공룡능선을 거쳐 노전암계곡을 지나는데 문득 귓가에 차르륵, 차르륵 이명(耳鳴)처럼 가늘고 규칙적인 울림이 반복되었습니다.
흠칫 놀라 걸음을 멈추자 이번에는 뚜벅뚜벅 보다 둔중한 발자국소리가 또렷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숨을 멈추고 자세히 사방을 살피자 바로 내 발치에 피에로의 모자를 닮은 세모꼴의 자줏빛 얼레지꽃이 방긋 웃고 있었습니다.
하마터면 그 둔중한 등산화로 밟을 뻔했다면서 눈을 돌리자 골짜기 가득 수많은 얼레지꽃들이 일제히 낮선 방문객인 나를 보고 웅성웅성 수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혹시 엘레지라는 단어를 처음 대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얼레지>는 결코 애달픈 사연을 가득히 담은 슬픈 노래, <엘레지>가 아닙니다.
그것은 아주 깊고 고요한 계곡(그것도 가까운데 계곡이 있어 자주 안개가 끼는)에만 꽃피는 매우 귀한 여러해살이풀(宿根草)입니다.
또 볼 때마다 신비한 느낌의 은은한 붉은 빛이 묻어나는 처연하게 아름다운 진자주 빛 봄의 전령사입니다.
남해안에 가끔 발견된다는 열대지방의 미조(迷鳥) 후두티의 볏을 닮은 삼각나팔형의 매우 아름다운 이 자그만 꽃송이는 무려 9년이란 긴 세월을 어두운 지심(地心)에서 웅크리고 기다리다 한해봄 잠깐 꽃을 피우고 다시 9년간을 잠복하는 인고(忍苦)의 생애가 그 옛날 우리네 할머니와 고모들과 그이들이 입었던 보릿고개의 남색 치마처럼 서럽도록 아름다운 매무새입니다.
그 얼레지가 저 어두운 지층 속을 뚜벅뚜벅 가로질러 마침내 내게 도착한 것입니다.
늙어가는 아내에게 꽃송이하나 따다 주려고 슬며시 손을 내밀다 문득 그 힘들고 긴 여정이 생각나 움츠러들고 말았습니다.
순간 나의 귓가에는 다시 나지막한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한참을 숨죽이고 들으니 그것은 얼레지의 발소리가 아닌 가만가만 봄이 다가오는 소리, 지구가 자전하는 숨소리였었습니다. 등에 한줄기 전율이 흘렀습니다.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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