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일흔 한 살의 동화(童話)」 (73)원수여 너를 찾아가는 쬐끄만 이 휴식2

말년일기 제1274호(2021.3.14)

이득수 승인 2021.03.13 16:47 | 최종 수정 2021.03.14 18:45 의견 0
서울 관악구 남현동 미당 서정주 생가의 석고상 [동국대 교육방송국]

요즘은 비교적 편안한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습니다. 우선 여기저기 간헐적으로 발생하던 통증들이 많이 정리되고 수그러져 모처럼 얼굴을 펴고 지낼 수 있게 되었고 <밥맛 좋은 약>을 타나 먹은 뒤 식사량이 늘어 정상인의 한 60%에 이르고 물러빠진 잇몸도 조금씩 단단해지고 있습니다. 

아직도 한 시간 글을 쓰거나 읍내시장에 다녀오거나 심지어 외식(어떤 때는 집밥을 먹어도) 먹는 일, 자동차를 타는 일 자체가 부담이 되어 한 시간 정도 쉬거나 잠을 자야하니 보통 불편한 일이 아닙니다만 그런 가운데 매일 한 시간 정도씩 산책을 하고 두세 번 일고 쓰기를 반복하니 그런 다행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루가 다 지나고 자정을 전후해 잠자리에 들면 먼저 잠이 든 아내를 보며,

“오늘도 정말 아무 문제 없는 좋은 하루, 하루치의 축복이 지나갔구나.”

하면서 하루 중 있었던 보람 있는 일, 첫째 몸이 편해 아무 일도 없었던 일과 아내와 마초와 셋이서 명촌리임도를 매일 산책해 잠든 아내의 숨소리가 나날이 안정이 되고 낮아지는 것이 큰 보람입니다. 결국 특별히 아무 것도 하는 일 없이 그저 몸이나 편하게 하루하루를 사는 생활, 이미 암의 5년 생존률을 넘은대다 이제 현대의학상 어떤 약도 주사도 없는 자유인이 된지 벌써 4개월 째, 나는 차라리 억지로 약을 먹을 때의 폐단과 고통이 줄어들어 전체적으로 좀 무기력하기는 하지만 훨씬 더 삶의 질이 나아진 것입니다. 말하자면 마치 벌거벗은 달걀이아 아무 것도 모르는 젖먹이아이처럼 더는 아무 것도 생각하거나 욕심내지 않으니 이렇게 몸과 맘이 편하고 특별히 무얼 바라거나 꿈꿀 일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도 어쩌다 잠을 놓친 한밤중엔 무려 5년 전 잠을 못이루어 저를 스쳐간 좋은 인연, 나쁜 인연의 하나하나를 한참이나 떠올리다 마침내 미당 서정주의 시
 
'원수여, 너를 찾아가는 쬐끄만 이 휴식'

이 나오는 <도화도화>란 시를 음미해 봅니다. 우선 여러분께 일독을 권하며 전문을 올립니다.


 도화도화 / 서정주

 푸른 나무그늘의 네 지름길 위에서
 네가 볼그스럼한 얼굴을 하고
 앞을 볼 때는 앞을 볼 때는

 내 나체의 예리미야서
 비로봉(毗盧峯)상의 강간사건

 미친 하늘에서는 
 미친 오피리아의 노래소리 들리고

 원수여, 너를 찾아가는 길의 
 쬐끄만  이 휴식,

나의 미열을 가리우는 구름이 있어
새파라니 새파라니 흘러가다가
해와 함께 저물어 네 집에 저물리라.

이 시는 제목 <도화도화>가 말하는 도발성, 또는 도화살이 연상되는 육감으로 보아 굳이 시 내용을 파헤치기보다는 전라도 고창 선운사 아래 주먹 만한 크기의 붉은 꽃이 해마다 뚝뚝 모가지가 떨어져 뒹구는 저 반역(동학란)의 땅에서 절 아래서 태어나 서당에 다녔다는 식민지의 청년이 가질 수밖에 없는 처절한 열패감과 불교적, 유교적 심지어 간간이 읽었을 서양서적에 나오는 화려한 영웅 조르아스터(배화교주)를 초인으로 받든 니체와 셰익스피어의 대표작 햄릿에 나오는 미친 오필리아의 노래소리와 비로봉 정상의 강간과 같은 땅에 떨어진 동백꽃처럼 온갖 슬프고 요망하며 음란한 기억들을 호출합니다.

미당 서정주 작품집 [동국대 교육방송국]

만사 주저할 수밖에 없는 파리한 식민지 청년의 한계로 그렇게 불안정한 삶을 살고 어지러운 시를 쓰던 그는 일제에 못 이겨 <우리 오장(伍長)>이라는 학도명과 가미자게를 강권하는 시를 쓰고 문명이 높고 많은 제가가 따를 땐 시도 없이 옆자리 여류시인의 치마폭을 건드렸다는 추문에 쌓였는데 요즘처럼 그 혹독한 <Me too> 사건이 터지기 전에 죽은 것이 그의 유일한 요행일 것입니다.

이제 하루하루 마치 보너스처럼 축복으로 사는 제가 왜 이렇게 독한 시를 꺼냈는지 곰곰 생각해보다 저는 문득 무릎을 탁 치며 벌쭉 웃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건 바로 그 교활하고 음험한 원수들 그 원수들을 마지막으로 제가 완전히 이제 정말 아무 미련도 없이 용서하기로 작정을 했기 때문에 그 난감한 시가 떠오르는 것을... 

악인이든 호인이든 저를 스쳐간 모는 사람의 행운과 죽은 영혼들의 명복을 빕니다.

平理 이득수 시인
平理 이득수 시인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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