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일흔 한 살의 동화(童話)」 (70) 마초할배는 어디 갔을까?

말년일기 제1271호(2021.3.11)

이득수 승인 2021.03.10 13:13 | 최종 수정 2021.03.12 10:57 의견 0
 사진2. 말무재의 석양풍경
말무재의 석양풍경

잔뜩 흐린 3월 초, 히뜩히뜩 눈발이 날리는 골안못 꼭대기 말무재로 가는 깊고 으슥한 골짜기에는 인적(人跡)은커녕 짐승의 흔적도 없고 겨우 몇 송이 피어나던 참꽃(진달래가) 늦추위에 꽃잎을 닫고 은은한 초록색을 띄며 기지개를 켜던 꽃가지는 다시 침묵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지난 초겨울부터 긴 겨울 내내, 가끔 눈이 내리고 한 며칠 골안못이 얼었다 녹고 다시 어는 사이 문득 하늘이 새까맣도록 찾아와 호수가득 V자의 헤엄흔적을 매달고 놀다가던 청둥오리의 군집(群集)과 단 몇 마리의 왜가리와 가마우지가 날아오르다 내리박히며 물고기를 쫓는 동안 그 많은 숲의 소리의 배경음악이 되고 메아리가 되어주던 거대한 반향(反響)의 스펀지, 노란 억새와 희끔한 갈새, 억새의 아우인 솔쇠, 개솔쇠와 수크렁과 띠풀들이 깃털이 부드러운 자잘한 풀씨를 하나둘 다 날려 보내고 끄트머리가 뭉개진 꽃송이의 마지막 솜털 몇 개를 바람에 띄우는데

“마초할배는 왜 오지 않을까?”
“그러게 말야. 작년에도 벌써 발걸음에 힘이 없이 무르팍이 자주 꺾이던 할배가 벌써 돌아가신 것일까?”
“아니야, 그렇지는 않을 거야. 만약 할아버지가 돌아갔다면 할아버지의 그림자 마초가 저 계곡 끄트머리 마지막 물웅덩이에 할배랑 앉아 말무재를 넘어가는 석양에 반짝이는 송장벌레의 헤엄과 할아버지의 발자국소리가 그리워 혼자 열 번도 더 이 골짝을 찾아와 혼자 방황했을 텐데 말이야.”
“그러고 보니 그러네...”

수십 년째 이 골짝의 키 큰 참나무와 이깔나무 숲에 동그란 구멍을 뚫고 살며 말라죽어 서너 해가 지나 가장 많은 딱정벌레들이 애벌레로 부화할 봄철을 맞아 해마다 한 쌍의 새끼 딱따구리를 길러 저 말무재 너머 안간월로 살림을 보내면서 이 골짝을 지키던 터줏대감 딱따구리 한 쌍은 벌써 6년 전 2015년 가을에 문득 조그맣고 노란 강아지 마초를 데리고 나타난 할아버지가 자기들에게 더 이상 접근하지 말라고 

“따그르르, 딱 따그르르 딱!”

 딱따구리 [픽사베이]

사정없이 경고음을 내자

“마초야, 너는 지금이 평생 처음 맞는 가을이라 저렇게 따그르르 나무를 쪼아 소리를 내는 딱따구리를 잘 모르지? 저 딱따구리는 나름 이 숲속의 작은 지배자로서 독수리나 부엉이 올빼미가 잘 드나들 수 없는 덩굴 숲에 숨었다가 아무도 없으면 저렇게 죽은 나무의 껍질을 쪼아 반딧불이, 딱정벌레, 사슴벌레와 장수풍뎅이의 유충을 잡아먹고 사는데 평소 배가 부르면 뚝딱뚝딱 부부가 그저 재미사마 나무등걸을 쪼며 나름대로 한 곡의 음악을 연주하지만 지금처럼 ‘따그르르, 딱 따그르르 딱!’ 소리 내는 건 낯선 새니 짐승, 그 중에서 가장 영리하고 교활한 사람이 자기들 사는 집주변에 다가오지 말라고 경고음을 내는 거야.”

하고 멍청히 올려다보는 마초와 이제 천천히 똑딱똑딱 장단을 맞추는 소리를 들으며 

“거 봐. 이제 저 놈들도 머리가 허옇게 늙은 영감과 아직 어린 노란 강아지가 자신들을 헤치는 것이 아니고 단지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계곡에 반사되는 오후의 석양과 꼬물거리는 송장벌레와 보기만 해도 <이 강산 낙화유수>가 절로 흘러나오는 널따란 낙엽하나가 개울에 떠내려가는 모습이나 즐기러 온 것을 짐작한 것 같이. 이제 우리가 내일부터 이곳에 나타나면 딱따그르 경고음보다는 똑딱똑딱 <작은 음악회>를 열어 줄 것이야. 정말 착하고 정다운 숲의 친구지.”

그렇게 주로 늦가을과 초봄에 가끔씩 이 숲에 찾아온 할아버지가 익숙한 나무쪼기 연주를 듣는 동안 이제 이 숲에  속에서 더는 무서워할 맹수가 없어 먹이사슬의 꼭짓점이 된 두 살, 세살, 마침내 다섯 살의 다 큰개가 되도록 그저 조용조용 숲속을 어슬렁거리다 가끔씩 할아버지를 바라보던 마초도 많이 보고 싶은 모양입니다.

“그런데 말이야. 이건 나도 주황빛 당근주둥이 늙은 왜가리한테서 들은 소식인데 말이야.”

이제 중년이 지나 눈가와 귓등으로 조금은 퇴색하고 빠져버린 수놈 딱따구리가 다시 입을 떼는데

“그래. 그 왜가리가 뭐라고 하던데?”
"지난해 가을 심하게 약물중독을 앓는 마초할배는 식욕이 없어 살도 많이 빠진데다 다리에 힘이 없어 이제 집 뒤 칼치못의 못둑만 한 바퀴 살짜기 돌고 간다는 거야.“
“저런, 그럼 마초는?”
"덩치가 커지면서 잡목림이나 못둑에 숨은 고라니를 쫓아다니기를 무엇보다 좋아하는 마초가 마침 오랜 단짝이자 단골인 늙은 수놈 고라니와 한참 달리기를 하는데 조금 밖에 걷지 못하고 못둑에 앉아 쉬는 할아버지가 안타까워 금방 할아버지에게 돌아가지.“
“그럼 심심해 죽던 고라니가 맘껏 한 번 달려보지 못 하고 실망이 크겠지.”

이렇게 주고받다가

“그럼 요즘은 어떻게 지내신데?”
“마침 할머니도 같이 운동을 한다면서 자동차로 할아버지, 할머니, 마초 세 식구가 명촌리임도 <늘뫼>를 찾아가서 키 큰 숲 사이로 난 작은 오솔길 <새목등>방향을 날마다 한 시간 정도 걷는다는 거야.”
“그럼 됐네. 숲속의 맑고 푸른 솔향기가 엔간한 병은 다 치료한다니까 할아버지도 곧 많이 좋아지시겠지.”
“그럼. 그래서 다시 마초와 함께 이 계곡에 오시겠지.”

문득 한순간 노란 햇살 한 줄기가 비치면서 골안못과 말무재 사이의 좁은 하늘이 열렸습니다. 내일은 아침부터 볕이 나고 봄바람이 불면 다시 참꽃이 피고 파랑새가 날아올지도 모를 일입니다.

平理 이득수 시인
平理 이득수 시인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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