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일흔 한 살의 동화(童話)」 (66)바람, 바람, 바람 ③적막한 봄을 깨운 그 자가...

말년일기 제1267호(2021.3.7)

이득수 승인 2021.03.06 16:04 | 최종 수정 2021.03.09 18:53 의견 0

이 이야기는 제가 70평생에 들은 이야기 중에 가장 엽기적이고 서글픈 이야깁니다.

어떤 날은 밤새 바람소리를 느끼지 못하고 아주 깊고 고요하게 잠든 날이 있습니다. 그럼 그런 날은 운문산의 삭풍이 큰마음을 먹고 고요한 상북뜰을 그냥 어루만지고 지나간 것일까요?

굳이 정답을 따지자면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건 단지 잠에 취한 우리가 바람소리를 못들었을 뿐이지 한 순간도 거의 쉬는 법이 없는 겨울바람은 비교적 가볍고 포근하게 들판을 스쳐가며 마치 걸음마를 매우는 아이가 무릎이 꺾여 잠시 안간힘을 쓰듯 조그만 논둑이나 언덕 아래 한참이나 맴돌며 사나운 대궁이만 남은 쑥대 아래 뽀얀 쑥 잎을 몇 개 매달거나 아직은 숨소리도 잘 내지 않고 마치 거름이나 걸레쪽처럼 납작 엎드린 봄맞이꽃(봄까치꽃) 사이로 아주 자잘한 보랏빛 점 좁쌀보다 작은 점을 여럿 씨뿌리기도 하고 아직 꽁꽁 언 수로의 얼음 위로 돌출된 새파란 풀잎 몇 개에도 은근한 공작을 벌여 날이 풀려 얼음이 녹기 바쁘게 한 덩이의 도롱뇽이나 개구리알을 보부상의 엽전꾸러미처럼 살그머니 풀어놓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몇 종류의 자연의 변화는 모처럼 색깔 있는 치마저고리로 갈아입고 나물을 뜯으러 나온 처녀의 설렘과 멀리서 논을 갈거나 나무를 지고 오다 그 광경을 보고 가슴의 쌍방망이질 소리가 물레방아소리보다 큰 시골청년이나 머슴의 동계(動悸, 울렁거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도 모두가 서로의 얼굴과 집안을 아는 전통마을이라 아무 말도 못하지만 밤이 되면 은근히 마을을 배회하며 처녀가 머무는 장지문에 모래를 한줌 뿌리거나 휘파람 같은 신호를 하여도 그 구애가 성공하는 경우는 극히 적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마음이 모두 목석(木石)이 아니라 그해 가을걷이를 마치고 앞집의 갑순이가 이웃마을로 시집을 가면 혼자 가슴을 태우던 뒷집의 갑돌이가 비탄에 젖어 뒷산에 목을 매러가는 슬픔, 그래서 <앞집에 처녀는 시집을 가는데 뒷집에 총각은 목메러 가네.>라는 아주 단순하지만 너무나 비장한 타령이 다 생겨난 것있니다.

그러나 이처럼 개활(開豁)된 공간에서 서로 수많은 처녀총각이 봄을 맞는 이 <경우의 수>가 많은 설렘이나 연애는 차라리 아름다운 하나의 꽃송이나 봄바람 같은 호사이지만 정말 봄은 오고 꽃이 피고 그 봄이 무르익어 꽃이 져도 한해 내내 총각하나 구경 못할 산골처녀도 있고 그 반대의 총각도 있겠지요. 

지금부터 젊은 한 시절 버스나 승용차로 부산에서 영주로 한해 한두 번 꼭 제사를 지내러 다니던 제가 느낀 아주 외로운 오지, 안적이라곤 없는 실개천을 따라 한 10리쯤 산속으로 들어와 문득 한 2천평 부채꼴의 양지땅을 갈아 콩이나 옥수수를 심거나 복숭아내, 사고, 포도를 심고 살아가는 숲속의 외딴집을 보면서 온갖 상상력을 다 발휘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구불구불 깊은 골짝을 들어와 막다른 산비탈에 자리잡은 과수원집의 처녀 하나, 멀리서 보아 몸매도 인물도 그저 두루뭉술해 보이는 저 처녀에게는 누가 봄바람을 실어다 가슴을 설레게 하고 페르몬 팍팍 뿌려 남자를 구하고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을 오갈 때마다 하게 되었는데 그건 그 좁은 과수원이나 화전밭은 보통 구불구불한 골짜기 10리 이상을 올라온 막다른 골목인데 그 뒤쪽이 전에는 없던 국도과 고속도로가 가며 보통 20, 30m의 높고 긴 방벽으로 꽉 막히니 저 외로운 처녀가 시장이 있는 읍이나 대처로 나가기 위해서는 우선 버스를 타는 곳까지 몇 시간을 걸어야 할 것이고 그 가난한 농장이나 과수원이 수입으로 어떻게 멋진 옷과 모자를 사고 핸드백과 가방을 갖출 수 있을까, 도대체 어떻게 인연을 만나 시집을 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었습니다.

노래방에서...

그런데 긴 세월이 흘러 제가 정년퇴직을 앞둔 지 얼마 안 되는 어느 날 동료들과 노래방에 가긴 갔지만 그날따라 술도 잘 안 당기고 신명도 없어 혼자 테이블에 앉았는데

“사장님은 왜 노래를 하지 않으세요? 어디 아프세요?”

표준말을 하긴 하는데 어딘가 어색한 경상도 사투리라

“그 말씨가 참 이상하네? 고향이 어디요?”
“예. 제 집은 중부고속도로가 군위를 지나 의성으로 들어가는 동쪽 언덕 아래 사과를 농사짓는 과수원인데 말입니다.”

몸매나 얼굴 화장이 도무지 세련되지 않고 약간 돌출된 덧니가 도무지 미모를 발견하기 힘든데 뜻 밖에 목소리는 꽤나 부드러워 한참이니 이야기를 들어주는데 세상에나, 나이 60이 다 되도록 그렇게 끔찍하고 엽기적은 봄바람을 처음 접하게 되었습니다.

십리도 훨씬 넘는 골짝을 허위허위 올라와 손바닥 만한 과수원에 이르면 고속도로의 옹벽으로 뒤가 막혀 세상의 그 누구와도 단절되어버린 공간, 지금 한물간 도우미가 된 처녀는 학교길이 멀어 초등학교를 마치자마자 부모를 도와 사과과수원과 고추농사를 돕는데 나이 스무 살이 금방 지나고 스무 다섯 살이 지나자 그래도 봄이 되면 이상하게 가슴이 뛰어 간혹 붉고 푸른 잠바를 입고 바라는 봐도 닿을 수 없는 도로쪽을 힐끔힐끔 살피다 또 한해가 지나가곤 하는데 하루는 말입니다. 자기 집에서 산길이 끝나는 도로에서도 또 한 시간을  걸어야 하는 면소재지에 커다란 화물트럭을 세워둔 서른이 좀 넘은 한 총각(화물차운전사)이 휘파람을 휙휙 불며 그 긴 골짜기를 올라와 물을 한잔 달라고 하며 과수원의 부모님과 처녀와 어울리는데 어릴 때부터 화물차조수로 잔뼈가 굵어 인제 어엿한 5톤짜리 지입화물차 사장으로 경기도에 조그만 아파트도 있어 마침한 사람만 있으면 장가를 가려는데 가끔 중부고속도로를 지나다 이 과수원 뒤를 자나가면 조그만 과수원에 어떤 날은 빨간 잠바, 어떤 날은 파란 잠바를 입고 좀 멀어서 잘은 안보이지만 유난히 머리채가 검은 처녀가 궁금해 큰마음을 먹고 왔다는 것이었지요.

산골 과수원 [충북땅TV]

그 총각이 세 번째 찾아왔을 때 이미 모든 의논을 다 마친 처녀의 부모가 닭을 한 마리 고와 반색을 하며 소주를 권하며 건성으로 총각집의 사정을 묻고 난 뒤 이제 서른한 살이 되는 딸을 불러 머리를 빗겨주고는 조그만 바구니에 물 한 병과 휴지 한 뭉치, 좀 큰 타월 한 장을 담아주면서 과수원 맨 꼭대기의 원두막을 가리켰답니다.  

그렇게 졸지에 부부가 되고 장인장모와 사위가 된 네 사람이 한 달에 서너 번 오는 사내를 기다리며 세월을 보내다 어느 새 처녀의 배가 부르고 아들까지 하나 낳았는데 이상하게 아이아비인 화물차운전사의 걸음이 뜸해지더랍니다. 아이가 백일이 지나도록 아비가 안 나타나자 뭔가 마음에 집힌 과수원집 사내가 조그만 과도 하나를 새파랗게 갈아 품속에 감추고 그가 주로 다닌다는 동대구 휴게소로 찾아가려는 순간 장터에 있는 파출소에서 순경이 두 사람 올라왔답니다. 그리고 가끔 들려 아이를 만들어주고 다시 오지 않는 화물차기사의 사진을 보여주며 이런저런 질문을 하다

“자식, 생긴 건 촌놈 같아도 완전히 상습범이구먼.” 하며 기가 막힌 이야기를 꺼냈는데 그 화물차기사는 이미 사과 집을 빼고도 소백산 바로 아래 인삼을 키우는 집과 청송의 고추농장까자 무려 세 집에 세 아내와 네 아이를 거느렸는데 그 3중 생활이 탄로나 인삼집의 장인에게 칼을 맞고 중상을 입어 병원에 입원주인데 목숨이 위태롭다고 했답니다. 

결국 모질고 못난 사내하나가 고요한 산골처녀에게 슬금슬금 봄바람으로 다가가 거대한 슬픔의 바다에 빠트린 이야기지요. 생각하면 할수록 인간의 탐욕이 너무나 두렵고 겁이 납니다. 조금은 어리숙하고 손해를 보더라도 그러 순하고 착하게 사는 것이 우리 인간 된 자의 도리(道理)가 아닐까요?

平理 이득수 시인
平理 이득수 시인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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