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추위와 이상난동의 중간에 질금질금 비가 내려 올해의 봄철은 좀체 기분이 나지 않아 울주군 상북면 명촌리하고도 등말리에 시집온 지 58년 어느 집 울타리 안에 머위가 자라고 어느 집 논둑에 제일먼저 쓴냉이가 돋아나고 달래는 누구네 무덤에서 뜯는 것이 제일 빠른지 마치 손금 들여다보듯 잘 아는 등말리의 신모(神母) 우리 세 째 누님이
“우리 동생 입맛이 돌아오게 아무개 미뜽(무덤)에서 달래이나 좀 캐 볼까?”
아내 앞에 가슴을 쫙 펴며 의기양양하게 나물바구니를 들고 나서는 지라 아내도 소쿠리를 들고 따라나섰습니다.
“야, 오늘은 날씨도 좋고 볕도 따뜻하고 마초야, 할아버지는 정말 오랜만에 달래된장과 쑥국을 먹을 것 같구나!”
양지바른 데크에 앉아 마초의 털을 골라주는데
“아이구, 허탕이다. 시절이 아무리 사납기로 우수가 벌써 지났는데 아직 달냉이도 쑥도 구경을 못 하겠네.”
하고 손을 탈탈 털고 들어왔습니다. 봄빛이 가득한 초록밥상을 받으려던 계획이 <라면에 찬밥>으로 전락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오후의 산책은 아예 작심하고 봄빛과 꽃을 찾아보기로 하고 평소 나지막한 논둑이 바람을 막아주고 볕이 양지발라 다른 곳보다 꽃이나 잎이 일찍 피는 것은 물론 한 겨울에도 멀리서 보면 은은한 푸른빛이 비치는 언덕 밑 몇 곳을 수색이라도 하는 듯이 샅샅이 뒤졌는데 아직 봄 자체가 기지개조차도 치지 않은 듯 도무지 연두 빛이나 초록빛이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다른 사람이라면 그게 그건지 다를 무언지 짐작도 못할 회갈색의 꾀죄죄한 이파리를 유심히 살펴 봄날의 들꽃 중에서 그 수세나 꽃이 가장 왕성한 지칭개 한 송이를 발견했는데 다른 해처럼 이파리를 한껏 벌려 품을 넓히며 초록색 꽃대하나를 내밀어 진자주 빛 꽃대를 내밀기는커녕 잎이 넓은 식물들이 겨울을 나는 유일한 대책인 로제타(장미꽃 형대)로 가장 낮게 키를 낮추어 바람을 견디고 가장 넓게 품을 벌려 햇빛을 흡수하는 12월 초의 자세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다음 우리 누님과 아내가 병든 저의 입맛을 돋우려 그렇게 찾아 헤매던 쑥과 냉이을 몇 포기 찾긴 했으나 역시 아무 볼품도 없었습니다.
'암만 그래도 그렇지 내일모래가 3월이면 부지깽이나물(망초)와 송기챙이(쏘루쟁이)는 키가 한뼘이나 자라야 되는데...'
미리 점 찍어둔 또 하나의 양지바른 언덕 밑을 을 찾아가니 망초, 쏘루쟁이를 찾긴 했으나 역시 아무 볼품도 없이 보얗게 먼지만 덮어쓰고 있었습니다.
'시절이 좋아야 민심도 좋고 이 좋은 봄날 계절이 좋아야 꽃들도 피고 내 기분도 좋아지고, 이제 한번이나 두 번 더 올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이 귀한 봄이 왜 이렇게 제대로 착색(着色)을 못하고 스산하기만 한 걸까?'
한숨을 푹푹 쉬며 집으로 돌아오자 화단에 엎드려 묵은 화초의 이파리를 잘라내던 아내가
“여보, 벌써 할미꽃이 피었네!”
“그래. 할미꽃이 벌써 피었다고?”
저는 금방 기분이 좋아져 마초에게 쇠고기로 만든 간식 두 점을 특식으로 제공하기로 했습니다. 단지 할미꽃이라도 환하게 피는 우리 집, 저 할미꽃처럼 미소가 가득한 아내가 신이 나서 김치를 썰고 고등어를 구워 밥상을 차리면 조금씩 입맛을 되찾아가는 저가 어느 새 한 두 번 다시 또 새로운 봄을 맞이할지도 모르니까요.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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