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일흔 한 살의 동화(童話)」 (42)봄을 찾아 나서다.

말년일기 제1243호(2021.2.11)

이득수 승인 2021.02.10 19:13 | 최종 수정 2021.02.13 14:43 의견 0
(사진1 은은히 봄기운이 배어나는 고헌산
봄기운이 은은하게 배어나는 고헌산

오늘이 양력으로 2월 중순이라 여느 해 같으면 언덕 밑에 쑥과 나물이 돋아나고 모든 활엽수의 줄기에 터질 듯한 자줏빛과 연두 빛의 봄빛이 자리 잡아 탱탱해진 수피(水皮)가 조금씩 갈리지가 마련인데 올해는 영 아닙니다.

명색 영남이라 보통 영하10도 이하를 잘 안 내려가는 이곳 상북면에 영하 7-8도의 강추위가 급습하고 그 사이에 문득 영상 10도의 봄 날씨가 두 번 끼어들더니 요즘은 낮 기온이 섭씨 15도가 넘어 반소매샤스를 입은 정년들이 예사로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오존층의 파괴로 인한 북극 빙산이 자꾸만 녹아내리는 기상재해, 아니 자연의 처절한 복수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지금 이맘때면 봉두난발(蓬頭亂髮, 쑥대머리로) 엉클어진 쑥대의 뿌리 짬에서 어렵잖게 쑥 한 줌을 뜯어 집집이 쑥국 맛을 보고도 남겠지만 올해는 어림도 없습니다. 논두렁 밑에 엎드려 은인자중 아주 작은 꽃을 피우는 봄까치꽃, 나락냉이 꽃도 추위에 얼고 더위에 녹아 넝마처럼 늘어져 감히 꽃을 피울 염두도 못 해고 새봄에 가장 먼저 들을 깨워 초록으로 물들이고 여름한 철 소금을 뿌리듯 눈부신 하얀 꽃을 피워내던 부지깽이풀(망초, 개망초)와 옛 선비들의 첫 봄 나물로 굶고 지친 동양의 선비의 목숨 줄이던 쏘루쟁이도 올해는 처음 피어나던 잎이 녹아 문드러진 후 다시 소식이 없습니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의 수도가 있는 만주 땅으로 잡혀간 봉림세자가 

 胡地無花草(호지무화초)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
 오랑캐땅에 꽃이 안 피니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네.

하고 탄식한 일이 있은데 생의 막바지에 몰린 마초할배가 그렇다고 날씨만 탓할 것이 아니라 오랜 촌사람의 영감(靈感)을 발휘해 차라리 봄기운을 한 번 찾아나서기로, 말하자면 봄을 재촉하러 들로 나섰습니다.

사진2. 상북면과 언양읍의 경계 부리시 봇디미
 상북면과 언양읍의 경계 부리시 봇디미

맨 위의 사진은 언양사람들의 영산(靈山) 고헌산의 전경인데 산 능선과 하늘의 경계, 약간의 황사가 내리면서 인간세계인 마을과의 경계를 흐릿하게 뭉뚱그리는 광경에서 뭔가 좀 느껴지는 게 있는가요? 사실 저 고헌산의 포근한 품 대통골을 비롯한 여러 골짜기엔 황갈색의 묵은 낙엽 속에서 비비추와 취나물, 미역취가 움을 내밀고 계곡 쪽으로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 쪼르르 쪼록, 아주 가끔 한 번씩 물방울을 굴리는 소리가 들리는데 그건 귀가 밝기보다 마음이 밝고 봄을 향해 잘 열린 사람이라야 들을 수 있는 것이겠죠.

두 번째 사진은 이불뜰에서 바라본 부리시 봇띠미의 사진입니다. 사진 앞 쪽의 가장 잘록한 부분이 상북면과 언양읍의 접점으로 제법 넓은 유역의 태화강이 잔뜩 몸을 웅크리며 뒤쪽으로 언양읍의 초고층 아파트와 울산 문수산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마치 모슨 회화교과서의 황금비율이나 대칭, 원근법과 시선의 처리를 가리키는 것 같은 저 문수산의 뒷면을 살짝 넘긴다면 이 나라 산업의 원동력 현대자동차와 중공업, 그리고 오늘도 돌고래가 유영(遊泳)하는 세계 포경업의 중심 방어진과 장생포항의 모습도 만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한 마리 파랑새가 되어 저 돌고래의 바다를 향해 비상(飛翔)해보시기 바랍니다.

 사진3. 올해 처음 발견한 봄의 전령, 봄까치꽃
 올해 처음 발견한 봄의 전령, 봄까치꽃

세 번째 사진들은 몇 시간이나 들판을 뒤져도 찾아내지 못해 사광리마을의 양지바른 골목에서 간신히 찾아낸  올해의 공식 첫 봄 꽃 봄까치꽃입니다. 예년엔 보통 여남은 포기 이상이 모여 피어 사진을 찍으면 구도가 잘 잡혔는데 오늘은 너무 뜨문뜨문하게 피어 중심조차 잡기가 힘들어 나태주시인의 <들꽃>이라는 시

자세히 보야야 아름답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내가 바로 그렇다. 

의 분위기가 잘 잡히지 않습니다. 말만 봄꽃이지 수세도 약하고 향기도 진하지 않아 아직 벌, 나비도 찾지 않는 꽃 어쩐지 차가운 느낌의 보랏빛 꽃 한송이가 거대한 창고 앞에 떨어진 녹슨 엽전(葉錢) 한 푼처럼 그저 서글프기만 합니다.

 4.사진4. 새매가 직박구리를 사냥한 자리
새매에게 사냥당한 직박구리의 잔해

마지막 사진은 들 가운데 경주이씨네 무덤 도래솔 뒤에서 발견 된 새들의 전쟁터 모습입니다. 어렵사리 겨울철을 잘 넘기던 회청색의 과점(寡占) 종 새 <직박구리>가 새매에게 당한 모습입니다. 직박구리로선 비극의 땅이지만 새매는 모처럼 한 끼의 저녁거리를 구해 배를 재우고 뱃속의 오롱조롱한 새알들을 키워낸 생존의 고비였지요. 이제 한 동안 더 세월이 흘러 운문산을 넘어온 봄바람이 마치 눈빛이 고운 선녀의 미소처럼 이 세상을 부드러운 바람으로 채우고 쏘루쟁이와 부지깽이나물과 나락냉이 씬냉이가 시샘하듯 피어나는 봄날, 개구리와 들쥐와 작은 촉새들이 나름대로 짝을 짓는 사랑노래에 정신이 없는 봄날, 저 직박구리 사냥에 성공한 새매는 마침내 한 대여섯 개 알을 낳아 품을 것입니다.

멀리서 보면 참으로 아늑하고 은은한 봄, 가까이서 보면 또 한 없이 냉엄하고 차가운 봄이기도 합니다. 

平理 이득수 시인
平理 이득수 시인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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