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일흔 한 살의 동화(童話)」 (39)남쪽 하늘 바라보며

말년일기 제 1240호(2021.2.8)

이득수 승인 2021.02.07 16:21 | 최종 수정 2021.02.10 00:04 의견 0
사진1. 우리집의 정남향 봉꼴산 봉수대(부로선 송신탑)
우리집의 정남향 봉꼴산 봉수대(부로선 송신탑)

저처럼 농촌 출신으로 나이가 좀 든 사람이라면 문득 유년이나 고향을 생각할 때 어떤 정경(情景)과 무슨 단어가 떠오를까요? 우선 <어머니>에 <동구(洞口)밖>, <우물가>나 <빨래터> 또 <초가지붕과 저녁연기>같은 생각이 떠오르겠지요. 그런데 저는 한나절을 곰곰 생각한 결과 문득 <남쪽 하늘>이라는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우리가 어릴 적 가장 큰 두개의 생존요건은 춥고 배고프고의 해결책인 따뜻하고 배부른 상황이었는데 배고픔은 좀 동물적이고 생리적인 느낌이라면 한 겨울 동쪽하늘에서 점점 남쪽으로 옮겨가며 마치 쇠죽솥의 솥전이 조금씩 달아 김이 나고 끓은 것처럼 따뜻하게 온몸을 녹여주던 그 남쪽 하늘과 태양은 보다 아련한 정신적 그리움인 것입니다.

그래서 고향이나 어릴 적을 생각하면 저도 몰래 떠오르는 노래 가사가
 
'머나먼 남쪽하늘 아래 그리운 고향...'
나훈아의 <머나먼 고향>

'남쪽 나라 바닷가에 물새가 나르면 뒷동산에 동백꽃도...'
홍민의 <고향초>

'산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박재란 <산너머 남촌에는>

등이지요. 일부러 추린 것이기는 하지만 이 정감어린 노래에는 똑 같이 남쪽 하늘과 남쪽바다와 남쪽마을이 나옵니다. 왜 우리는 고향이나 어릴 적을 생각할 때 왜 동쪽이나 서쪽 북쪽도 아닌 꼭 남쪽이 생각날 까요?

그것은 남쪽이 우리네 삶의 중심을 잡아주는 희망과 꿈의 방위(方位)지만 현실적으로는 남쪽 바람의 간지럼에 풀잎이 피고 귓속말에 꽃봉오리가 열고 그리고 벌과 나비가 몰고 오는 유혹에 꽃이 피고 열매가 열기 때문이지요. 보다 더 현실적으로 이야기하면 온갖 곡식과 채소와 과일이 남쪽을 바라보고 결실을 맺으니까 그렇기도 하고.

그래서 촌아이들의 꿈은 늘 파랑새가 날고 태양이 눈부신 남쪽입니다. 그 남쪽엔 희망찬 미래가 있고 아름다운 소녀의 미소도 있을 것 같지만 현실적으로는 빵과 밥이 있고 직장이 있는 곳이니까요.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렇게 고향을 떠난 남쪽의 낯선 도시에서 학교나 직장을 열심히 다녀 마음속의 요정(妖精) 같은 소녀를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며 제 또래의 노인이 된 사람이 이번에는 따뜻한 남쪽항구에서 제 어릴 적의 고향을 떠올리고 향수에 젖는데 그 때도 역시 그가 그리워하는 곳은 남쪽나라, 남쪽바다가 되어 그 노래의 끝은 대체로 <마음은 고향하늘을 날아갑니다>로 끝을 맺는 것이지요.

저 역시 몹시 가난한 농촌에서 자라며 그 가난이나 배고픔처럼 두려운 존재, 추위가 없이 사철 꽃이 피는 따뜻한 남쪽나라를 꿈꾸었고 그렇게 발을 붙인 사철 동백꽃이 피는 항구에서 한 40년 젊음을 소진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워하는 만큼 치열하게 일했고 또 그 치열함만큼 약간의 성과와 든든한 가족의 울타리를 가지자 이번에는 역으로 늘 따뜻한 남쪽나라를 동경하던 유년의 땅, 사철 바람의 냄새가 싱싱하던 고향 신불산아래로 돌아와 집을 짓고 글을 썼읍니다. 비록 지금 중병에 걸렸지만 지극히 정상적인 인생의 행로, 촌놈의 노력만큼 흙 묻고 땀에 젖은 성공을 거둔 것입니다.

 사진2. 날씨 좋은 날 볕을 쬐는 라꾸라꾸침대
 날씨 좋은 날 볕을 쬐는 라꾸라꾸침대

요즘은 현대의학으로도 어떤 주사나 약 같은 처방이 없는 상태에서(제가 아무리 의지의 한국인임을 자부해도) 하루하루 여기저기서 조금씩 온갖 장기(臟器)들이 그간 자신들이 겪어온 핍박과 중노동과 현재의 괴로움을 토로(吐露)해 그게 하나하나 아픔이 되지만 어쨌든지 그 여러 종류의 통증을 대충 단도리를 해 그중 제일 심한 통증하나와 마치 연애라도 하듯 들여다보며 하루하루를 때우는데 아무리 진통제를 먹어도 또 눈을 감고 마음을 달래고 이를 악물고 눈물을 삼켜도 안 될 때는 베란다로 나와 우리 집에서 정 남향 방향인 봉꼴산(부로산) 꼭대기의 봉수대(봉돈)와 현대식 송신탑을 이윽히 바라보면 슬그머니 통증이 줄어드는 경우가 있는데 그건 아마도 우리 촌사람들이 본능적으로 좋아하고 그 품에 안기고 싶어 하는 오래된 열망과 향수, 그리움의 발로이겠지요. 

그리고 햇살이 따뜻한 정오나 오후 두 시경 비스듬히 라꾸라꾸 침대에 누워 볕을 쬐면 어느 새 숨길이 편안하고 통증이 사라져 가끔 짧은 낮잠에 빠지기도 하는데 그럴 때 마다 제 발치에는 나의 분신 마초가 저도 모처럼 혼곤히 낮잠을 즐기고 아무 말은 않지만 거실에서 창을 통해 저를 바라보는 아내의 눈길을 느낄 때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첨단문화가 발달해도 저 같은 사람이 다시 치유가 되기는 어렵겠지만 저는 하루하루를 차분하게 나와 같이 놀자고 찾아오는 크고 작은 통증들을 다스리며 라꾸라꾸의자를 펴고 남쪽하늘을 바라보며 풍선이나 비눗방울처럼 제 몸과 마음이 다 가볍게 둥둥 뜨는 날, 영원이란 날개를 단 안식(安息)이란 천사가 찾아오는 날을 기다려야겠지요. 서기 2021년 2월 2일, 오늘도 명촌리의 남쪽 하늘은 눈부시게 푸르고 따뜻합니다.

平理 이득수 시인
平理 이득수 시인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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