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일흔 한 살의 동화(童話)」 (36) 장터할매 울리기①
말년일기 제1237호(2021.2.5)
이득수
승인
2021.02.04 17:21 | 최종 수정 2021.02.06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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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어수선하다 못해 숨이 턱턱 막히는 상태에서도 어김없이 민족의 명절 <설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정상으로 돌아가는 설대목이라면 <자갈치>같은 재래시장은 지금쯤 제수용 생선과 과일 떡, 건어물과 해산물 설빔 아동복과 하다 못해 양말이라도 한 번 바꾸어 새해를 느끼려는 인파가 재래시장골목을 미어터지게 하고 백화점에는 정육이니 홍삼이니 굴비니 잘 사는 사람들의 돈 자랑도 볼 만할 때입니다. 설날 선물과 설빔은 물론 가족마저도 5명 이상이 모여 제사를 못 모시게 하는 올해의 이 삭막한 설대목에 그래도 설은 설이니 만큼 마초할배가 달콤한 대목이야기를 며칠 이어나가기로 하겠습니다.
2009년 4월, 부산서구청에서는 재래시장 살리기의 일환으로 구덕원두의 오랜 전통시장 <동대신동시장>의 주차장을 정비하고 아케이드를 설치하는 대규모공사를 마친 동대신동 골목시장의 준공식을 여는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일 하필이면 구청장은 예기치 않았던 구청장, 군수협의회 연락이 오고 부구청장은 또 다른 일이 있어 부득이 주민복지국장인 제가 구청장을 대신하여 축사를 하도록 스케줄이 변경되었습니다.
늘 제게 호의적인 서규수 부구청장이 서기관 국장이 되어 처음으로 구청장을 대리하여 참석하는 대외행사인 만큼 가분을 한 번 내어보라고 국장용의 승합차가 아닌 부구청장용의 검은 승용차와 기사까지 내어주는 바람에 저는 한껏 부푼 마음으로 행사장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가는 도중 나는 자신이 대독할 축사를 읽어보다 그만 묘한 감흥에 빠졌습니다. 바로 전형적인 재래시장인 언양장터에서 고춧가루와 무배추의 씨앗과 미꾸라지를 팔던 어머니와 신평 큰누님, 콩나물을 길러 팔던 큰엄마, 장터에서 시골아주머니가 이고 오는 수탉을 뺏다시피 흥정하는 키 큰 아버지의 모습이 오버랩 되는 것이었지요. 이어 조그만 지게를 받쳐놓고 김장배추의 시래기를 줍고 있는 동그란 얼굴의 소년, 바로 자신의 유년시절이 떠오른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행사장에 도착해 식순에 따라 경과보고와 상가번영회장의 대회사가 끝나고 구청장축사순서가 되자 사회자의 소개를 받은 제가 단상에 섰습니다. 먼저 인사를 하고 제가 구청장을 대신해 참석한 이득수국장인데 이 좋은 자리에 우리 구청장님이 직접참석하지 못하고 제가 와서 대단히 아쉽고 송구스럽다, 구청장을 대신해서 제가 이 새롭게 단장한 시장과 여러분의 그동안의 노고에 진심으로 축하와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며 원고를 읽어가던 저는는 갑자기 발칙한 생각하나가 떠올랐지요. 그래서 읽던 원고를 덮고 잠시 숨을 고르고는 분위기를 바꾸어.
"여러분, 저도 사실은 언양장날 고춧가루와 무, 배추씨앗과 미꾸라지를 팔던 어머니와 닭장수를 하던 아버지의 아들로 자라난 장돌뱅이소년이었습니다. 제가 지금 서구청의 국장이 되어 여러분 앞에서 이렇게 축사를 하게 된 것도 사실은 우리 어머니가 장날마다 열심히 고춧가루를 팔아서 공부를 시켰기 때문입니다. 5일 장날이 올 때마다 우리 어머니와 누님들과 제가 그 좁고 더운 디딜방앗간에서 그 매운 고춧가루를 빻느라 눈물, 콧물을 흘리고 재채기를 하면서 말입니다."
이렇게 운을 떼자 갑자기 분위기가 물을 끼얹은 듯 숙연해지더니 장내의 모든 시선이 뚫어질 듯 단상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처음 국민학교에 입학했을 때, 친구들과 시장골목을 지나면 저는 구질구질한 물건들을 늘어놓고 쭈그리고 앉은 우리 어머니가 너무 창피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조금씩 들면서 무덤덤해졌고 어쩌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주는 일원짜리 한 장으로 사과나 눈깔사탕을 사먹는 것이 너무 좋았고 장사가 잘 되어 술이 얼근히 취한 아버지가 물이 조금 갔지만 양이 많은 갈치나 가자미나 삼마라고 불리는 꽁치를 넉넉히 사와 온 가족이 모처럼 생선찌게를 실컷 먹는 밤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어쩌다 어머니가 사오시던 강냉이박상도 좋았지요. 언젠가 한번은 아버지께서 큰맘 먹고 빨간 5원짜리 지폐를 주셨는데 너무나 기분이 좋아 이마에 붙이고 다니다 그만 바람에 날려가 잃어버린 일이 있습니다. 그날 오후 내내 울던 저는 지금도 그 빨간 5원짜리를 생각하면 너무나 아깝고 원통해서 속절없이 눈물이 날 지경이랍니다."
누군가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렸고 코를 훌쩍이는 사람도 있었다. 슬며시 사방을 둘러본 저의 눈가에 이슬이 촉촉해지더니 잠시 뜸을 들여 조금 추스르고는...
(내일 계속)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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