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2000년 새로운 밀레니엄이 온다고, 밀레니엄의 기준인 양력이나 기독교도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 동서양의 전 인류 뭔가 새로운 기대로 설렐 때 신은 마치 그 전주곡(前奏曲)이나 예언(豫言)처럼 프랑스의 심령학자이자 소설가인 베르나르 베르베르를 소설 <개미>를 통하여 우리들에게 무슨 선지자(先知者)내려 보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젊은 작가가 말하는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영혼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긴 스토리와 짧은 잠언으로 접하게 됩니다.
저 역시 한 무리의 개미를 중심으로 생물계에서 가장 작은 동물에 속하지만 무지하게 많은 무리와 강력한 신호전달체계와 복종, 늘 최선을 다하는 전투, 그리고 불과 1년 미만의 짧은 삶을 살다가면서도 자기 후손들에게 무언가 지식을 남기려는 의지, 그래서 개미도서관과 개미박물관을 만드는 대단히 긍정적이며 의지적인 동물, 만약에 지상에 인류가 멸망하면 그 대신으로 이 우주과학이 판을 치는 지구들 제패하고 지배할 경이로운 존재로서의 개미를 관찰하고 개미의 전쟁과 전략, 전술을 연구하는 그 전무후무한 스토리에 흠뻑 빠져 그의 다음 소설, 즉 죽음에서 영혼과 영원에 이르는 이야기 <타나토노트>에도 흠뻑 빠졌습니다.
그런데 그 책들을 읽은 지가 이미 20년이 넘고 그간 정신적 육체적인 변고를 수도 없이 겪어 오늘처럼 겨울 볕이 노랗게 거실을 방문해준 오전에 혼자 사색에 잠기어도 좀체 그 이야기의 본체는 떠오르지 않고 그 이야기 가운데 한 용감한 개미 전사가 늙고 늙어 마지막 전투에서 살아남은 날 문득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아, 이게 진정한 내 모습이란 말인가? 백전백승의 영웅이 더듬이 끝이 하나 부러지고 다리 두 개가 비틀어진데다 그 가는 허리가 자주 아프고 좁은 안면 구석구석에 상처가 가득한 것이 진정한 내 모습이란 말인가?”
하고 개탄하는 모습이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저는 시골에서 자라며 소나기가 거쳐 간 말끔한 황토 길을 가로지르는 개미의 행진, 무너진 언덕 밑에서 한 무리는 여왕을 호위하고 한 무리는 자신보다 훨씬 큰 거의 쌀알만 한 개미 알을 피난시키면서 대부분의 개미전사들이 자신들과 비슷한 또 한 무리의 개미와 백병전(白兵戰)을 흔히 보아왔고 며칠 뒤 그 자라에서 사방으로 흩어 진 목에서 머리가 잘리거나 가장 잘록한 허리가 잘려죽은 수많은 개미의 시신을 발견하는데 여왕개미의 시신과 알이 보이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알은 약탈당하고 여왕개미는 그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시신이 훼손된 것일 겁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개미 발에 워커>라고 함부로 취급하는 이 하잘 것 없는 작은 존재 개미가 사실은 이 지상에서 가장 호전적인 종(種)이며 단 한번이라도 전쟁이 일어나면 반드시 승리를 하기 전에는 절대 멈추지 않는 종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신기한 것은, 그 개미들의 전투가 빈발하는 시기가 주로 밭에 하얀 참깨꽃이 피는 시기로, 모든 곡식 중에서 가장 희고 신비한 조그만 색소폰 같은 그 참꽃아래 개미떼들의 시체를 보면 저는 그 때마다 스페인내전을 배경으로 한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두 주인공 미국용병 로버트 조단과 스페인의 아가씨 마리아를 생각하게 되는데 아마도 한 때 스페인내전에 참전한 그 고독한 작가 헤밍웨이도 강수량이 극히 작아 이슬마저 잘 내리지 않는 메마른 땅 스페인의 참깨꽃 아래 엎드려 총을 쏜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저는 해마다 개미의 전투와 참깨꽃과 헤밍웨이의 이야기를 포도에세이에 올리곤 했습니다.
자, 이야기는 다시 아까 그 늙은 개미전사에게 돌아갑니다. 개미들의 전투무기는 웃기게도 엉덩이에서 배출되는 시큼한 독액인데 그들은 적이나 침략자가 가까이 오면 얼른 엉덩이를 쳐들고 마치 스컹크가 다른 침략자에게 가스를 발사하듯 쏘아대면 달팽이 같은 침략자들이 기겁을 하고 물러서지만 사람은 냄새기능이 좋은 사람이라야 약간 시큼한 냄새를 풍길 정도랍니다. 그리고 최후의 무기는 바로 무엇보다 튼튼한 이빨로 상대의 가장 취약한 부분인 잘록한 허리와 머리와 목 사이를 물어 동강내는 것이지요.
저는 로마사(史)에 나오는 일렬종대의 전투대열이 늘 한 줄로 늘어서 하나가 죽으면 다음 하나가 나가는 이 개미들의 전법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초기 시저의 군대가 알프스를 넘어 <갈리아>라고 불리는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의 키가 크고 조밀해 햇빛이 잘 들어오지 않는 활엽수림을 정벌할 때는 <백인대(百人隊)>라고 불리는 가로세로 10명씩의 부대가 왼쪽 1번부터 일직선으로 숲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그 때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그 늙은 개미전사는 로마의 <백인대>와 비교하면 처음 한 97번이나 98번의 초보병사에서 이런저런 전투에 자꾸만 선임자가 죽어 며칠 전 처음으로 백인대의 대장이 되어 선두로 출전해 적들을 다 섬멸했지만 자신의 부하들도 자 죽고 혼자 남게 된 것이겠지요.
며칠 전 하도 날씨가 추워 방안을 빙빙 돌다 문득 거울에 비친 자신, 윤곽도 분명하지 않은 얼굴의 이목구비가 하나같이 처지고 눈썹마저 반이나 빠진 얼굴의 자신이 마치 <개미>에 나오는 늙은 전사(戰士)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요. 저는 그 험한 세상을 참으로 오래 살아남아 마침내 이 명촌리의 백인대장, 늙은 전사가 되어 홀로 남은 것이지요. 그렇다면 언젠가는 몰라도 나와 무척 가까운 곳에 있다는 나의 적이자 동료인 암세포와 대화와 전쟁을 이어나가야지요. 그래서 언젠가 인류가 암을 정복한 그 기록영화의 마무리 부분에 화약연기가 가득한 전장(戰場)의 어느 능선, 그 치열한 인간과 암의 전쟁의 마지막 백병전에서 기다란 창을 꼬나든 머리가 하얀 늙은 전사로 기록에 남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또 항간에 코로나19의 백신자체가 위험하니, 않으니 핀란드의 예를 들어 말썽이 많은데 제게 접종기회가 오면 이 늙은 전사의 마지막 전투이자 임무라 생각하고 흔쾌히 팔뚝을 걷어야겠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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